Q & A


  1. 통일교회 신자들에 대한 탈퇴설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 목사이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서, 왜 이렇게까지 심하게 반대하는지요?

    A1. 통일교회(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가르침 및 존재자체가 기독교의 존망을 좌우하는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정의(社會正義)”를 위해서 반대한다는 식으로 말을 퍼뜨리는 반대파 목사도 있습니다만 그들이 반대하는 동기의 핵심부분은 자기들이 믿는 기독교의 교리를 지키려는 “신앙”을 건 투쟁입니다.

    통일교회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인 “참가정”을 이루는 데 구원의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이상가정을 이루는 것은 만민공통의 소원이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초종교의 입장에 설 수가 있고, 신도, 불교, 유교 등의 타종교와도 화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를 믿는 데에 유일한 신앙기준을 두기 때문에 “교조주의(敎條主義)”에 빠졌을 경우에는, 십자가를 믿지 않는 타종교와 화합하기가 곤란한 측면이 있습니다.

    2000년의 기독교사를 연구하면 알 수 있듯이, 기독교는 “십자가신앙”에 적대된다고 여겨진 종교에 대해서는 과격하게 공격해 왔습니다. 십자가전쟁이 그러한 한 예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는 십자가로 죽기 위해서 오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에서는 십자가는 2차적인 예정이고, 하나님의 본래의 바라심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만약 통일교회의 가르침이 옳다면,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기독교는 그 가르침의 핵심부분인 십자가의 교리를 변경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그것은 기독교로서는 절대 인정 못할 일이고 존망을 건 싸움까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가르침을 일본에 전하기 위해 선교사가 파송된 것이 1958년 7월 15일이었습니다. 다음 해 10월 2일, 첫 예배가 도쿄 신주쿠에서 거행되었고, 그 후 짧은 기간 안에 전도가 폭발적으로 진행되어서, 64년 7월 15일, 통일교회는 종교법인의 인증을 받고 일본사회에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통일교회의 가르침이 사회에 확산된다는 것은, 기독교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곧 기독교의 위협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반대파 목사들은 점차 하게 되었습니다.

    모리야마 사토시(森山諭) 목사(일본 크리스트교단)에 의한 최초의 감금사건이 일어난 것은 1966년 봄이었습니다. 원만한 대화로 탈퇴시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강경수단으로 나선 것입니다.그것은 통일교회가 종교법인 인증을 받은 지 겨우 1년 반이 지난 때였습니다. 반대목사들이 활동하는 동기에는 기독교의 신앙이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43년 간에 4000건이 넘는 탈퇴설득사건이 발생한 것은 대단히 비정상적인 사태입니다. 이것은 반대목사들한테 “통일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하는 정통이단논쟁(正統異端論爭)과 통하는 종교적 동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기가 있는 한 탈퇴설득사건은 쉽게 종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모리야마 사토시 목사는 이러한 동기에 대해서 “그들(통일교회)이 기독교를 자칭하지 않는다면 문제를 제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를 자칭하고...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사람들을 혼란시킴으로, 그냥 놓아둘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반통일교 활동에는 기독교 목사 뿐만이 아니라, 좌익사상을 가진 저널리스트라든가 변호사 등도 연대하여 참여하고 있습니다.연대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A2. 통일교회의 선교활동은, 십자가 해석을 둘러싼 교리논쟁의 영향 때문에, 기독교권에 있어서는 선교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기반이 작고 인구의 1%도 안 되는 일본사회에서는 설득력 있는 통일교회의 가르침으로 선교가 성공해, 단기간 안에 기반이 폭발적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특히 70년대,80년대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위기감”을 느낀 것이 일본의 공산화를 꾀하고 있던 좌익세력이었고, 또한 오랫동안 일본의 기독교화를 소망해 왔음에도 선교가 잘 안 되던 기독교였습니다. 양자는 거의 동시기(과격해지는 것은 70년대 후반)에 반통일교회활동에 열심히 착수하게 됩니다만,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1978년 3월에, 일본공산당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일본의 민주세력은 그들(통일교회와 승공연합)을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몰아넣어, 그 활동의 여지가 없도록 해야 한다”(”원리운동과 승공연합”일본공산당 중앙위원회 출판국, P131)

    이 목표는, 십자가신학에 집착하는 기독교(특히 반대목사)의 목표이기도 합니다.아사미 사다오 씨(일본기독교단)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통일협회를 붕괴시키는 또 하나의 길이 있다. 그것은... 여론을 강화시킴으로써 그들이 일본사회에 발 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아사미 사다오 저”통일협회=원리운동”P224)

    이 “일본사회에 발 붙이지 못하게 하는”것이 바로 양자의 공통목표입니다.게다가 탈퇴를 설득해 확보한 전 신자(前信者)는 “그 후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고, 역으로 통일교회 신도들을 구출하려고 전도하게 된다(모리야마 목사의 변(弁), ‘크리스천신문’76년 3월 21일호”라고 하는 것입니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전반에 걸쳐서, 공산당계의 정신병원을 이용한 강제개종사건(强制改宗事件)이 다발했습니다. 그러나 잇달아 발생한 정신병원사건은, 거기서 탈출해 나온 통일교회 신자가 민사로 “손해배상청구재판”을 일으켜, 86년2월28일, 통일교회 신자가 승소(도쿄지방재판소)하는 것으로 종식되었습니다.

    그러나 건수가 해마다 늘어난 것이 뭐냐하면 반대파 목사들과 친족들이 결탁해서 일으키는 감금을 포함한 탈퇴설득사건이었습니다. 정신병원을 이용한 강제개종을 못하게 된 좌익세력은, 이 때부터 기독교 관계자 측을 지원하는 형태로 협력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부터 기독교 관계자들과 좌익세력이 협력하면서 탈퇴설득을 함으로써 확보한 전 신자들을 앞세운 재판투쟁을 개시한 것입니다.그것이 “청춘을 돌려달라 재판” “혼인무효(婚姻無效)재판”입니다. 이러한 재판투쟁은 “일본사회에 발 붙이지 못하게”하는 것을 목적으로 여론을 높이기 위한 그들의 활동의 일환인 것입니다.


  3. 반대파는 통일교회 신자가 납치 감금 당하고 탈퇴설득을 받는 등의 심각한 “인권침해”를 왜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은폐하고 있는 건지요?

    A3. 반대파의 목적은 통일교회를 없애는 것입니다. 반대파들은 그것을 목표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독교 관계자, 전 신자들, 좌익계 저널리스트, 반대파 변호사 등은, 통일교회 신자가 납치 감금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인권침해의 사실이 밝혀지지 않도록 은폐해 온 것입니다.

    반대파들이 활동하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의 감금사건은 66년에 일어났고, 이후 43년 간 파악된 것 만해도 4000건이 넘습니다.

    감금 수법을 만들어낸 모리야마 사토시 목사는 “통일교회는 이단”이라고 하는 “마녀사냥”적인 동기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서해석에 관해서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구약성서 해석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온건한 대화로는 탈퇴까지 몰아넣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감금해서, 탈퇴설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뒤따라 똑같은 “통일교회 없애기 운동”의 목표를 세운 죄익진영이 반통일교회 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좌익진영은 60년, 70년 보안투쟁에서 최전성기를 맞이해, 70년대 말, 늦어도 80년대 초에는 일본이 공산화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의 우호단체인 “국제승공연합”이 68년에 창립되었고, 승공운동이 사회에 확산되면서 일본의 적화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특히 좌익진영이 위기감을 느낀 것은 78년 4월의 교토부(京都府)지사 선거에서의 공산당 패배입니다.

    일본공산당의 미야모토 겐지 위원장(당시)은 공산당 현(縣)지구위원장회의에서 “승공연합과의 싸움은 중대함.대중투쟁, 이데올로기, 국회, 법률의 각 분야에서, 그리고 피해를 받고 있는 세력들이 연합해서 전면적인 싸움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음.자민당에 대해서는 “승공연합하고 같이 하면 반격을 받게 됨으로 손해를 본다”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함. ‘승공연합퇴치’의 선두에 서는 것은 후세의 역사에 기록될 ‘거룩한 전투’임”(”적기(赤旗)”78년 6월 8일)이라고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했습니다.

    이때 마치 잇달아 발생한 것이 공산당계에 의한 정신병원을 이용한 탈퇴설득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정신병원을 이용한 방법은 인권침해재판으로 통일교회 신자가 승소대신 그 후로 해마다 증가한 것이 친족을 끌어들여, 신자를 감금해서 강행하는 탈퇴설득사건이었습니다.

    이 설득사건의 결과 탈퇴한 전 신자가 재판을 해서 그것을 매스컴이 보도함으로 소위 말하는 “영감상법(靈感商法)”문제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짓밟힌 신교의 자유”112~141페이지, 광언사)그리고 자민당 등 통일교회 지지자들에 대해서는 “영감상법을 행하는 통일교회에 가담하느냐”라고 규탄해, 분리작전을 해온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영감상법문제는 “승공연합과 손을 잡으면 반격을 받게 되기 때문에 손해 보는 상황을 만들어라”라고 하는 “미야모토 노선”을 현실화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 “통일교회 없애기”를 꾀하는 반대파들의 소원이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활동실적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법입니다. 영감상법문제를 적극적으로 취재하고 보도해온 저널리스트 아리타 요시후(有田芳生)씨는 자민당 의원한테 “영감상법이지요? 그 후로 관계를 딱 잘랐습니다”라고 하는 답변을 듣고 “미야모토 노선”의 실적확인을 하고 있었습니다(아리타 요시후의 ‘취성만록(醉醒漫錄)’06년 9월 23일).

    이러한 사람들에게 영감상법문제는 적극적으로 보도해야 할 내용이지만, 납치감금으로 인한 강제개종사건은 감추고 싶은 내용일 것입니다.


  4. 일본공산당은 통일교회 및 국제승공연합에 대한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만,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역사가 있었던 것일까요?

    A4. 통일교회 및 국제승공연합을 괴멸시키는 것이 좌익세력의 목표입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78년 6월, 일본공산당의 미야모토 겐지 위원장(당시)은, 통일교회 관련단체인 국제승공연합에 대해서 “승공연합 퇴치의 선두에 서겠다”(’아카하타(赤旗)’)라고 선전포고를 했습니다만, 68년부터 78년까지의 10년 간, 승공연합과 공산당 사이에 다양한 공방(攻防)이 있었습니다.

    일본 공산화의 위기는 종전 이후 몇 차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60년, 70년에 안보투쟁 때는 학생들과 청년 층에 좌익세력이 침투해, 공산주의혁명이 실현될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위기적 상황을 타파하려고 68년에 창설된 국제승공연합은 국내에서 승공운동을 추진했습니다. 회원들은 주요도시의 역앞 광장이나 길거리에 나가서, 공산주의의 잘못을 호소하는, 계몽활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70년 9월, 무도관에 2만 여명을 모아 “WACL(세계반공연맹)세계대회”를 개최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72년 4월, 미야모토 위원장에게 12항목의 “공개질문장”을 송부했습니다. 그러나 답변이 안 와서 6월 6일, 일본공산당 본부에 가서 “공개토론회에 응하라”라고 하며 요망서를 전달했고, 시부야와 신주쿠의 역앞 광장에서 가두토론회(街頭討論會)를 준비해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일본 공산당은 계속해서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6월 22일, 마이니치테레비(현재의 테레비토쿄)가 “다큐멘트 토크”라는 프로그램에서 공산당과 공개토론을 했으면 하는 요망이 왔습니다. 승공연합은 이에 응했으나 공산당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프로그램은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승공연합이 공산당원들의 필독교과서인 “공산주의 독본”을 비판하자 공산당은 비판을 받은 부분을 변경, 삭제해 재출판한 것입니다.그래도 계속 비판하니까 “공산주의속본(共産主義續本)”을 절판해, 결과적으로 공산당은 이론전(理論戰)에서 완전히 패배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상의 경위로 공산당은 78년 3월, “원리운동과 승공연합”을 출판해 “일본의 민주세력은 그들을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몰아넣어, 그 활동의 여지가 존재조차 못하게 해야 한다”(131페이지)라고 호소하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 다음 달, 교토부(京都府)지사선거에서 공산당은 패배했습니다.승공연합으로 인해서, 28년이나 지배해왔던 교토부정(京都府政)이 무너졌기 때문에, 미야모토 씨는 “승공연합 퇴치”를 호소하며, 기를 쓰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교토부출신인 저널리스트 아리타 요시후 씨는 학생시절에 공산당의 학생조직인 민주청년동맹(민청)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 후에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아리타 씨의 아버지는 공산당 교토부 위원회 부위원장이었고, 89년의 참의원선거에서 비례대표 명단에 이름이 오를 정도의 인물입니다. 아리타 씨 또한 대학교를 졸업한 후, 공산당계 출판사에 입사(77년)할 정도로, 아버지에 이은 독실한 공산주의 활동가입니다. 승공연합 및 통일교회를 계속 비판해 오는 아리타 씨는, 말하자면 미야모토 노선의 계승자인 셈입니다.

    또한 반대파 목사에 의해 신앙을 포기한 신자의 재판을 담당하는 변호사 중에도, 좌익사상을 가진 정치적 의도가 농후한 변호사들도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5. 전국 영감상법대책 변호사연락회(전국변련)는, 1987년부터 시작된 “영감상법”문제를 적극적으로 채택해, 통일교회 비판을 반복해왔습니다. 이 “전국변련”이 발표하는 내용을 매스컴은 자주 보도했습니다만, 이 단체설립의 배경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A5. 통일교회의 우호단체인 국제승공연합은, 1960년대부터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잘못을 호소하고, 일본의 공산화 및 사회주의화를 저지하는 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또한 승공연합의 우호단체인 “스파이방지법제정촉진 국민회의”는 일본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암약하는 간첩이나 공작원을 법적으로 단속하기 위해서 “스파이방지법” 제정추진 운동을 했습니다. 전국영감상법대책 변호사연락회(전국변련)는, 이러한 국민운동 저지를 목적으로 설립된 정치적 의도를 가진 단체입니다.

    1978년, 교토부지사선거에서 28년에 걸쳐 교토를 장악했던 공산당부정(共産黨府政)이 패배한 것은 좌익세력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만, 그들이 더 큰 위기감을 느낀 것은 “레프첸코 사건”이었습니다. 1979년에 미국으로 망명했었던 레프첸코 씨가 82년 12월, 워싱턴에서 일본 내의 소련의 비밀정보기관인 KGB에 의한 스파이활동 및 공작원에 관한 충격적인 증언을 했습니다.

    83년부터 국제승공연합과 사회당(현 사민당) 사이에 “레프첸코사건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재판은 레프첸코의 증언이 CIA와 국제승공연합의 모략이라고 “사회신보(社會新報)”에 기재된 것에 대해, 국제승공연합이 사회당을 명예훼손으로 기소한 것입니다(94년에 사회당이 국제승공연합에 해결금 200만엔을 지불함으로써 화해) 이 재판의 사회당 측 대리인변호사 중 한 사람이 야마구치 히로시(山口廣) 변호사입니다. “스파이방지법”제정에 위기감을 느낀 좌익세력이 국제승공연합 및 통일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86년 11월 26일에 “스파이방지법안”을 제출했을 때부터입니다.

    전국변련의 발족의 배경에 대해서, “‘영감상법’의 진상”(세계일보사, 206~207페이지)에 의하면 요코하마(橫浜)변호사회 소속인 오노 츠요시(小野毅) 변호사가 86년 10월 23일, 일본 저널리스트회의의 심포지엄에서 “발족당시에 피해자는 한 명 밖에 없었으나, 변호단을 발족하고 매스컴에 보도 협조를 요청해, 피해자를 발굴하자는 이야기가 되어 있다” 라고 말함과 더불어 전국변련이, 공산당계를 핵으로 한 좌익적 활동가 변호사들의 집단인 청년법률가협회(청법협)를 중심으로 스파이방지법 저지를 위해 발족된 경위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통일교회의 일부 신자들이, 개개인의 경제할동으로 개운상품(開運商品)이나 불구(佛具)를 판매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매행위는 어디까지나 판매원과 그 관계회사가 행한 것이고, 통일교회는 그러한 판매행위에는 일체 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국변련의 변호사들은 “영감상법의 수법으로 모아진 자금이 스파이방지법 제정추진 운동의 자금이 되고 있다”라는 억지 추측으로, 좌익적 매스컴과 결탁해 “영감상법”반대캠패인을 전개한 것입니다.

    그후로 1년이 지난 87년 10월 23일, “아사히 저널”의 이토 마사타카(伊藤正孝)편집장은 토교 긴자(銀座)에 있는 시세이도팔러(資生堂parlour)에 극히 친한 기자들을 모아, “‘영감상법’과 저널리즘”이라는 주제로 강연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는 ‘피해자’라는 말을 쓰지만 고객의 9할은 다 기뻐하고 있다. 그들은 9할 9분이라고 말하지만 다 기뻐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겨우 1%정도의 반대자들에 대한 것만을 보도하느냐. 이러한 항의가 (그들한테) 몇번이나 들어왔었다....분명히 그들의 말에는 일리가 있어서, “영감상법”피해를 호소하고 있는 것은 거의 5% 미만이다. 우리도 여론조사를 한 것이 있는데, 대부분은 지금도 대리석 항아리의 효과를 믿고 있다”

    이토 편집장은, 이 날의 집회가 말하자면 “내부” 모임이었기 때문에, 비판 캠페인을 하는 데는 모양새가 안 좋다고 생각해서 숨겨놓은 데이타(5%미만)를 폭로해 버린 것입니다.

    이토 편집장의 발언으로도 알 수 있듯이, 반대파들은 사실에 근거해서 보도하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든 사회문제로 만들고, 통일교회와 국제승공연합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특정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출발한 것이 소위 말하는 “영감상법”캠페인이었다는 사실을 숙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6. 1987년에 시작된 소위 “영감상법”캠페인의 배경에는 “사전공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 신자들의 활동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이는 어떤 것인지 설명해 주세요.

    A6. 1987년 2월 14일, 아사히(朝日)신문이 “영감상법” 캠페인을 개시했습니다. 그 때부터 매스컴 등을 통해서 “반사회적인 영감상법을 행하는 통일교회”라는 비판을 전개했습니다. “영감상법”캠페인에는 이를테면 “사전공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전 신자들의 활동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를 탈퇴한 전 신자들은, 자기들의 헌금에 대한 환불요구 뿐만이 아니라, 통일교회 신자들이 경영하는 기업에 취직했었을 경우에는, 종교법인 통일교회(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와는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객들에게도 손을 써서 환불하게 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반대파 목사인 와가 싱야(和賀眞也) 씨가 주재하는 에클레시아회의 “에클레시아 회보” 제21호(82년 6월 11일)에는, M 씨가 탈퇴한 경위와 더불어, 그녀가 탈퇴한 후 탈퇴설득자와 함께 자기 고객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다닌 사실이 다음과 같이 보고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탈퇴를 결의하고, 오오사카까지 동행하여, 인감과 대리석 항아리를 구입한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의 집을 찾아가, 잘못을 고백하고 다녔다”(14페이지)

    또 동 회보 제18호(82년 3월 10일)에도, “작년 천만엔을 넘는 거래해약에 이어, 또 다시 고액상품의 반납 및 해약에 성공했다. 피해를 보신 분은 나가노 현에 사는 미망인이고, 불행한 체험을 협박상법에 이용당해 죽은 남편의 재산 1300만엔을 지불했다. 그 후에 에클레시아회에 의해 이것이 통일협회의 영리사업이라는 것을 알고 문제해결에 힘써 왔다”(6페이지)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고객을 방문하여, 일부러 영리사업과 통일교회을 연관시켜 이야기를 함으로써 해약 및 환불을 하게 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구치 다미야(田口民也) 저 “통일교회에서의 구출”에도 전 신자가 자기가 취직했던 기업의 고객을 만나고 다니며, 상품을 반납하게 하는 운동을 했었다는 사실이 다음과 같이 보고되어 있습니다.

    “(탈퇴후의)그는 영감상법으로 대리석 항아리나 다보탑을 구매한 사람들한테 가서, 몇 번을 쫓겨나도 열심히 자기 잘못을 사과하고 예수 크리스트로부터 구원받은 기쁨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F 씨라는 부인은 처음 3일 간은 현관에도 못 들어오게 했으나, N군의 성실한 태도와 진심에,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하시고... 심지어는 그 분도 예수 크리스트를 믿게 되고... 다보탑을 반납하고 대금을 환불 받았다고 합니다”(189~190페이지)

    또 일본기독교단 출판국이 발행한 “신도의 벗” 1988년 5월호에도 전 신자들의 호소에 의해서 환불이 이루어진 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개인을 특정할 수 없어서 몇 가지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인한테 상담했더니, 돌고 돌아 어떤 목사를 소개받았다. (통일교회 신자의)아내한테는 거짓말을 하고, 어머니하고 셋이서 그 목사관을 찾아갔습니다.

    (아내의 탈퇴)설득은 밤 8시부터 새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2시경, 갑자기 마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영감상법에 관한 피해신고가 많이 늘고 있는 것, 문선명 씨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기독교와의 차이점 등을 그 목사는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헌금이나 어머니가 낸 것까지, 피해액인 1450만엔은 변호사를 통해서 통일교회 및 판매회사에게 계약 취소를 요구한 결과, 거의 전액이 돌아왔다”(20페이지)

    이렇게 반대파들은 “기독교와의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설득해서 탈퇴시킨 전 신자들을 이용해 본인들이 바친 헌금 뿐만이 아니라 통일교회 신자가 경영하는 기업에 환불을 청구하게 하여, 그 액수까지 “영감상법”의 피해액수에 포함시켜 통일교회 비판에 이용해 왔습니다.

    반대파들은 “영감상법”캠페인이 시작도 하기 전에, 다양한 전 신자들의 환불소송 및 피해자를 발굴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매스컴에서 캠페인이 시작되자, 그 때까지 구입한 상품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이 불안감을 느껴, 소비자 센타 등에 상담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또 매스컴에서 보도되어, 조금 씩 “영감상법”문제의 소동이 확대되었습니다.

    반대파들에 의한 탈퇴설득사건이 없었다면, 전 신자들이 고객에 가서 취소하게 하는 사전의 공작활동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소위 “영감상법”문제가 이렇게까지 사회문제로서 확대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통일교회 신자들에 대한 납치감금사건은 순수히 “가정문제”로 인한 것이고,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강제개종그룹”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들었습니다. 진상은 어떻습니까?

    A7. 납치 및 감금행위는 가령 그것을 친족이 했다 하더라도 범죄행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반대파들은 그 범죄행위를 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싶어서 그러한 소문을 내기도 하고, 납치행위는 어디까지나 친족들이 행하고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반대파들과 매스컴은 통일교회 비판을 반복해 왔습니다.반대파들이 암약한 43년 간에 나온 비판서(주간지 등은 빼고)는 벌써 100권이 넘어, 반대파들의 생각은 지극히 지나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비판내용에는 통일교회 내부에서 폭행이 행해지고 있다는 등의 비방중상(誹謗中傷), 미해결의 흉악사건에 대한 근거도 없는 “통일교회범행설”, 더 나아가서 사실관계를 왜곡해서 만들어진 문선명 선생의 “경력사칭의혹”, 통일교회의 출판물에 대한 “상호모순”의 말꼬투리 잡기, 통일교리를 곡해한 “교리비판”, 소문에 지나지 않은” “반대파 목사의 설득으로 탈퇴한 신자들이 일으킨 소송, 소위 “청춘 돌려달라 재판” “영감상법 재판”, “혼인무효 재판” 등의 재판기록이나 보도 같은 것이 탈퇴설득을 위한 비판자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런 자료는 다 친족들로 하여금 불안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들입니다.비판서를 읽고 불안감을 갖게 되고, 거기에 기재된 상담창구 등에 연락해서 반대파 목사와 연결된 친족은, 더 선동되어 결국은 반대파 목사나 전 신자들과 협력태세를 만들어 통일교회 신자들을 “탈퇴설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파들은 “가족 만으로는 구출하지 못하나, 가족 만이 구출할 수 있다”(“일본해신문(日本海新聞)”07년 5월 28일)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즉 탈퇴설득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친족과 반대파의 “공투(共鬪)”가 필요 불가결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족 만으로는 구출 못한다”라고 하는 이유는, 탈퇴설득에는 통일원리 비판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과 탈퇴시키기 위한 테크닉이 필요해서입니다. 아사미 사다오(淺見定雄) 씨가 “통일협회=원리운동”에서, 책의 반 정도를 할애해 교리비판을 했고, 또 가와사키 교코(川崎經子) 목사가 “원리의 기모노(옷)를 벗자”라며 통일교회원을 설득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아사미 사다오 씨도 “교리에 대해서는 잘 아는 설득자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통일교회=원리운동”29페이지)라고 지도하고 있습니다.

    한 편으로 “가족 만이 구출할 수 있다”라는 측면에서 친족들은 “대화하기 위한 환경 마련”이라고 사칭하고, 신자를 맨션 등에 감금하는데, 그 진정한 목적은, 반대파 목사를 만나게 하고 통일교회 신자를 탈퇴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납치감금에 이은 “탈퇴설득”은 납치감금의 실행범인 친족 만으로는 불가능하고, 말하자면 탈퇴설득의 전문가라고도 할 수 있는 설득자가 개입해야만이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일본기독교단은, 1993년 1월 28일의 성명문(聲明文) “또 다시, ‘통일원리’ 문제에 관한 성명”에서, “통일협회를 탈퇴한 전 신자들의 소송 또한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피해자의 구제와 피해자를내지 않기 위한 운동이 추진되고 있다”라며, 그 소송이 일련의 조직적인 반대활동의 “열매”라는 것을 언급해 “일본기독교단은 다시금 이 문제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앞으로도 한 층 더 노력해서 통일교회의 실태를 세상에 알려, 피해자를 내지 않기 위한 활동을 함과 동시에 피해자의 구제에 힘을 투입하고, 통일교회가 없어질 때까지 활동할 것을 표명한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공산당도 “일본의 민주세력은 그들(통일교회)을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궁지에 몰아넣어, 그 활동의 여지가 존재 조차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통일운동과 승공연합”일본공산당 중앙위원회 출판국, 131페이지)라고 공언하고, 오랜 기간 동안 활동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8. 통일교회 측은 “납치, 감금”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는 “보호, 구출”이고, 친족 간에 있어서의 “대화”에 불과하다는 반대파의 주장을 들었습니다. 진상은 어떻습니까?

    A8. 친족들은 “대화를 위한 환경마련”이라며 신자를 맨션 등에 격리합니다만, 그 진정한 목적은 반대파 목사를 만나게 하여, 통일교회 신자를 탈퇴설득하는 데 있습니다. “대화”라는 것은 명목이고,탈퇴를 성공시키기 위한 작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탈퇴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만약에 “이런 갇혀진 곳에서 반대파 목사하고 만나기 싫다”라고 거부하면, 친족과 더불어 무기한이 될 수도 있는 감금생활이 한없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야마자키 히로코(山崎浩子) 씨의 경우 “(친족들이)원리강론 해설을 하라고 해서, 열심히 설명해도, 처음 3줄에서 말이 막혀버린다. 왜 우리 친족은 이렇게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 만 있는 걸까” (“사랑이 거짓이으로 변할 때”185페이지)라고 탄식하고 있으나, 이것은 대부분의 케이스에서 사용되는 작전 중 하나입니다. 친족은 신자의 생각이나 통일원리를 이해하려는 동기로 강의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암초에 걸리게 교리논쟁의 흉내 만 내고, 마지막에는 “역시 이해가 안 간다”라며, 목사가 개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대화”를 할 거면 자유로운 환경에서 서로의 마음이 통한 상태로 완전히 서로가 이해할 때까지 성실히 대화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반대파 목사(친족이 아닌 설득자)가 개입하면, 아사미 사다오 씨가 “부모는 설득자와 본인과의 대화에 끼어들어, 말을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통일교회=원리운동”38페이지)라고 지도하고 있듯이, 친족은 “감시역”에만 집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사미 씨는 “본인은 이해한 것처럼 보였는데도(라고 나는 믿었는데도)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또 다시 통일교회에 돌아가고 말았다고 하는 통한의 사례도 몇 가지 있다”(“통일협회=원리운동” 44페이지)라고 함으로써 설득한 신자가 그 후에도 통일교회의 신앙을 계속 갖는 것을 “통한의 사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 가와사키 교코 목사도 “설득에 관한 몇 가지 주의사항”으로서 “(목사를 만나게 할 때에)절대 타협해서 기한을 정해서는 안 됩니다. 기한이 있는 설득은 성공하지 못 합니다. 기한을 정한 순간, 이미 승부는 끝난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일주일 만 참고 자기방어를 하면... 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오히려 자녀를 격려하는 것이 됩니다”, “복수(2명 이상)의 설득자의 이점은... A목사의 설명이 부족했던 부분을 B목사의 말로 보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시각으로 봄으로써 “위조탈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점입니다”(”통일교회의 정체”191 ~193페이지)라며 신자가 탈퇴를 결의한 뒤에도 “마음이 침울해지고, 흔들리는 현상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아직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동 195페이지)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목사는 “기한이 있는 설득”을 강하게 금하고 탈퇴에 이르기까지 무기한의 탈퇴설득을 하게끔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 다짐을 하듯이 “마무리를 게을리하고 있지는 않는가”(196 ~197페이지)라고 강조하고, 통일교회의 신앙을 “송두리째 없애기” 위한 지도를 철저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발언으로도 알 수 있듯이 반대파의 안중에는 통일교회 신자를 “탈퇴시키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자의 신앙을 존중하는 배려 같은 것은 아예 없습니다. “마무리”를 게을리 하고 있는지 어떤지, 또는 “승패”를 따지는 자체가, 이것은 정상적인 대화의 자리가 아니라, “신앙(사상)의 파괴공작”의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통일교회 신자의 탈퇴를 철저히 하는 그 자세는 말 그대로 냉혹하고, 그들이 말하는 “대화”를 끝내기 위해서는 “탈퇴”라는 선택 밖에 없기 때문에 통일교회 신자는 그야말로 지옥의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명확히 탈퇴를 거부한 고토 토오루(後藤徹) 씨의 경우, 감금기간이 무려 12년5개월에 걸쳤습니다. 이 감금의 장기화는, 탈퇴하지 않는 한 감금을 풀지 않기 때문이고, 이런 수법을 “대화”라고 할 수는 절대 없는 것입니다.


  9. 납치감금이 동기가 되어서, PTSD(심적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발증해, 계속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납치감금의 피해자수에 비해, PTSD등의 후유증으로 고통받게 되는 사람의 비율은 어느 정도입니까?

    A9. 통일교회 측이 파악하고 있는 납치감금의 피해자수는 1966년부터 현재까지의 43년 간에 4000명이 넘습니다. 또 저널리스트인 요네모토 가즈히로(米本和廣) 씨의 취재에 대해서, 반대파 인물이 “최저 5000명은 있다”(”월간현대”04년 11월호, 289페이지)라고 대답하고 있고, 통일교회가 파악하지 못하는 수면하에서 피해를 받은 사람이 상당히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 야마자키 히로코 씨 실종사건(1993년 3월)이 일어난 전후, 매스컴의 통일교회 비판 보도가 격화되었을 때 사건이 격증했고, 91년에 302명, 92년에 375명, 93년에 360명으로, 불과 3년 간에 1000명이 넘는 피해자가 나왔습니다.

    PTSD피해자 비율은 상당수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만, 감금은 신자가 탈퇴할 때까지 무기한으로 이어져 피해를 입은 신자의 7할이 탈퇴했기 때문에 파악이 안 됩니다. 또 자력으로 감금장소에서 탈출해온 약 3할의 사람들 중, 심각한 정신적 대미지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런 사람들한테도 2번 또는 3번 납치감금이 반복되어, 결국 어쩔 수 없이 탈퇴해버려, 그 후에 경과를 알 수가 없어 파악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위조탈퇴 등으로 궁지를 벗어나 통일교회로 돌아온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위조탈퇴 기간에 접근할 수 있었던 전 신자 중에 의미불명한 발언을 하는 사람, 자살미수, 인간불신, 무기력, 사회복귀가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 등, 심각한 정신적 대미지를 받은 사람들을 몇 명 만났다고 합니다. 또 위조탈퇴해 통일교회로 도망 온 사람도, 악몽에 시달리는 등의 증상이 보이기 때문에, PTSD피해의 비율은 상당수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종교학자 데이비드 브롬리와 제임스 루이스가 조사한 “컬트탈퇴 증후군, 그릇된 원인의 귀속”(1987년)에 의하면, 탈퇴자 중, 강제적 방법으로 탈퇴를 강요받은 사람들의 61%에서 “의식부유 또는 변성(變成)상태”가 보여 (강제적이 아닌 사람의 경우는 11%), 기타 악몽47%(강제적이 아닌 사람의 경우는 11%), 건망증, 기억상실58%(강제적이 아닌 사람의 경우는 8%) 환각, 환영(幻影)36%(강제적이 아닌 사람의 경우는 4%), 단조로운 정신적 리듬 56% (강제적인 아닌 사람의 경우는 3%), 과격한 감정적 폭발 42% (강제적이 아닌 사람의 경우는 9%), 자살, 자기파괴적 경향 31% (강제적이 아닌 사람의 경우는 9%)라는 조사보고가 있습니다. 이 조사에서 강제적 설득이 얼마나 큰 정신적 대미지를 주고 있는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10. 기독교 역사 가운데 일본에서의 신자박해가 가장 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박해 하면 로마제국에서의 기독교 박해가 유명합니다만, 일본의 크리스찬 박해가 제일 심했다고 알려지는 이유를 알려주세요.

    A10. 1597년 2월, 나가사키(長崎)26성인의 순교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일본은 길고 험한 크리스찬 박해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크리스찬 박해에 대해서 크리스찬사(史)연구가인 가타오카 야키치(片岡?吉)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계사 가운데 로마제국시대 300년의 기독교 박해가 가장 잘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토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박해에는 미치지 못한다. 로마 박해의 경우는 황제한테 관엄(관대한 마음과 엄숙한 마음)이 있었거니와, 박해가 중단된 것도 있었고, 교황 밑에 신부들도 있어서 제의(祭儀)까지 거행되고 있었다. 토쿠가와 바쿠후 250년에 걸친 박해는 중단된 적이 없었고, 단속 또한 면밀, 엄중했고, 다 순교해서 신부가 한 사람도 없는 시대가 7세대에 걸쳐 이어졌다” (“탐방, 대항해시대의 일본 - 크리스찬의 비극” 소학관, 36페이지)

    일본에서의 크리스찬 박해가 달리 예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했던 이유는, 박해자가 신자들에게 “순교자의 길”을 택하지 못하게 하고, 신앙을 버릴 때까지 감금해서 계속 고문하는 방법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1607년에 일본에 들어온 선교사 올파넬(Orfanel)은, 그 때 당시의 박해상황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찬을 몰살하기는 쉬운 일이었으나, 박해자들은, 그것보다도 넘어지게 하는(신앙을 버리게 하는)방법을 택했다. 이유는 크리스찬을 몰살해도 그들을 자기 의도에 순종시키지 못했다고 하는 모욕을 당하는 것이 되고, 자기들이 진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박해자들이 원했던 것은 자기들의 명령에 (크리스찬을)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탐방, 대항해시대의 일본 - 크리스찬의 비극 40페이지)

    이렇게 박해자는, 기교(棄敎)를 위해서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는 여러 수법을 시도했습니다. 고문의 종류도 음습하고 잔혹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문헌에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①화형 - 살아 있는 인간을 불에 태워죽이는 방법으로, 기둥에 묶어 고통이 오래 가도록 일부러 끈을 약하게 묶음으로써 사람이 넘어지게 한다. 장작은 기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태운다.

    ②죽(竹)톱자르기 - 크리스찬을 길가에 설치한 기둥에 묶은채 목에다가 상처를 내놓고, 옆에 죽톱(대나무로 만든 톱)을 갖다 놓는다. 형리(刑吏)와 통행인이 죽톱으로 흉터를 찢는다.

    ③구덩이에 매달기 - 깊이 2미터, 직경1미터 정도의 구덩이 옆에 매다는 대를 세워, 신자의 발을 대에 묶어 구덩이 속으로 거꾸로 매단다. 내장이 역전하거나 머리에 피가 머리에 괴어서 빨리 죽지 않도록 몸을 끈으로 둘둘 감고 귀에 조금한 구멍을 뚫어놓는다. 가운데를 반원으로 도려낸 판자 2장을 허리에 대어 뚜껑으로 한다. 또 고통을 배가(倍加)시키기 위해서 구덩이 속에 오물을 넣을 때도 있었다.

    ④운젠(雲仙)의 지옥고통주기 - 운젠 유황천의 분출구로 데리고 가서 자루가 긴 국자로 열탕을 퍼, 그 국자 바닥에 뚫린 조그마한 구멍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신체에 붓는다. 고통이 오래 가도록 의사가 화상을 입은 상처를 치료해, 오두막집에 짚을 깔고 그 위에 눕혀서 쉬게 했다. 히루에 한 번 한 그릇의 밥과 정어리 한 마리가 식사로 주어져 고문은 여러 날에 걸쳐 계속되었다. (참고 : “탐방, 대항해시대의 일본 - 크리스찬의 비극” 및 오카다 아키오(岡田章雄) 편 “일본의 역사 10 - 크리스찬의 세기”에서)

    이와같이 크리스찬을 순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감금했고, 또 여러 방법으로 고문한 것입니다. 그 중에도 “구덩이에 매달기”는 잔인했고, 그 때 당시 일본에 들어와 있던 반 크리스찬인 홀란드인 조차도 그 음습한 고문방법을 보고 매우 혐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운젠의 지옥 고통주기”는 고문으로 입은 상처를 치료하고, 식사를 주고 체력이 회복이 되면 또 다시 고문을 가하는 방법으로 고문이 진행되었습니다. 기교시키기 위해서는 말그대로 “사탕과 채찍”방식으로 크리스찬들의 심신을 가지고 놀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에 있어서의 크리스찬 박해는 신자가 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은 감금상태가 언제까지라도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장기간 박해를 받은 기독교가 이번엔 박해하는 측에 서서 육신에 대한 고문은 기본적으로 없더라도, 기교를 목적으로 감금하고, 통일교회 신자가 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 언제까지라도 감금을 계속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난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박해의 역사 가운데, 가장 잔인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이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 기독교 목사들이 친족과 손을 잡아 신자를 감금하고 기교목적으로 탈퇴설득하는 것은 지극히 심각한 문제이고, 이러한 신교의 자유의 침해행위를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라는 이름 하에 방치해온 일본사회는, 후세로부터 큰 단죄를 받을 것입니다.


  11. 길고 험했던 일본에서의 크리스찬 박해가 끝난 것은, 어떤 경위로 인한 것입니까?

    A11. 유감스럽게도 일본정부 스스로가 “신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아니고, 계기는 “우라카미(浦上) 사건”에 대한 제외국에서의 비난, 외압으로 인한 것입니다.

    크리스찬 박해에 있어, 바쿠마츠(幕末)시대부터 메이지(明治)에 걸쳐 “우라카미 사건”라고 불리는 대박해가 일어났습니다.

    토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가 쇄국(鎖國)을 푼 지 7년이 지난 1865년, 나가사키에 오오우라텐슈도(大浦天主堂)이 건립되었습니다만, 그 때 오랫동안 잠복해 왔던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것은 세계종교사의 기적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 2년이 지난 1867년 7월, 막부의 포리(浦吏)가 우라카미에 쳐들어가 크리스찬들을 납치했습니다.

    신자들은 고문에 굴해, 한 번은 기교를 표명하나, 곧바로 신앙를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해인 68년 7월, 또 다시, 신자들은 포박되어, 후쿠야마(福山), 츠와노(津和野)를 비롯해, 가고시마(鹿兒島), 히로시마(廣島), 오카야마(岡山), 히메지(姬路), 마츠에(松江), 도또리(鳥取), 도쿠시마(德島), 다카마츠(高松), 마츠야마(松山), 고치(高知), 와카야마(和歌山), 나고야(名古屋), 가나자와(金澤), 도야마(富山)등의 정든 고향집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을 당해, 거기서 기교를 강요받은 것입니다. 그들(크리스찬)은 호출할 때도 “한 마리, 두 마리”라고 세는 등, 개와 같은 취급을 받았고, 낯선 땅에서 감금을 당해, 기교를 강요받았습니다.

    이렇게 크리스찬 박해가 진행중이었던 1871년 11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특명전권대사로 한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이 요코하마항(橫濱港)을 떠나, 1년 10개월에 걸쳐 조약개정문제의 교섭을 위해서 미국으로 해서 서구제국(西歐諸國)을 방문했습니다. 그 때, 크리스찬을 박해하고 신교의 자유를 인정치 않는 야만의 나라하고는 조약을 맺지 못한다는 심한 비난을 받은 것입니다.

    이 이와쿠라사절단의 경위를 나가이 다카시(永井隆)저 “오토메 도게(乙女峠)”(중앙출판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가도, 일본정부가 인민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 않는 나라는 야만국이다, 라고 하는 비난의 여론이 이와쿠라 대사일행을 공격해, 특히 벨기에의 브뤼셀에서는, 일행이 타던 마차가 시내를 지나갈 때 시민들이 모여들어, 저마다 비난하고 인민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고 유폐되어 있는 우라카미의 크리스찬을 감옥에서 석방하라, 라고 외치고 그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사절단은 토쿄에 전보를 쳤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 마다 크리스찬 추방자와 신교자유에 관해, 외국국민들의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이참에 전자에 관해선 이들을 즉시 해방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자유 관대한 의향을 표명하지 않는 한은 도저히 외국신민(外國臣民)의 우의적 양여(友誼的讓與)를 기대할 수 없다.’

    이 전보는 정부를 놀라게 했습니다.... 작다고 생각했던 종교문제가 평등조약을 맺는 데 있어 제일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72 ~73페이지)

    이러한 제외국에서의 외압을 받은 일본정부는, 결국 1873년 2월 21일, 크리스찬 금령(禁令)을 해제해, 3월 14일엔 각지에 유폐되 있던 신자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교의 자유를 허락한 일본은, 겨우 야만국으로서의 오명을 해소하고 제외국과 평등한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현재 납치감금사건을 무시하는 일본정부는 세계의 진정한 리더국가가 되기 위해서 이러한 과거의 역사적 경위에서 많은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12. 반대부모의 모임이 유출한 정보가, 국회질의에서 채택되어 문제가 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또 아리타 요시후 씨도 근거 없는 정보를 여러가지 유출해 왔다고 들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정보입니까?

    A12. 반대파는 “통일교회에서는 폭행살인이 행해지고 있다” “실종자가 있다” “범죄자가 된다” 등, 통일교회 신자의 부모들을 불안감에 빠뜨리는 별의별 소문을 내왔습니다.

    1977년 2월, 전국원리운동 피해자 부모의 모임(반대부모의 모임)은, “통일교회 신자의 조사대상자 119명 중, 실종자 32명, 사망 3명, 심리적이상자 49명”이라고 하는 정보를 발표했습니다. 이 정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부모들은, 통일교회의 신앙을 버리게 하려는 반대파 목사들하고 손을 잡아, 탈퇴설득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결과 그 때부터 감금사건이 다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 “반대부모의 모임”의 정보는, 1977년의 중의원(衆議員)예산위원회에서 당시의 사회당(현 사민당)의원에 의한, 통일교회 공격을 위한 질문의 자료로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부모의 모임”의 정보는, 근거없는 허보(虛報)였던 것입니다.

    사실은 “반대부모의 모임”의 앙케트 요청문에는, “아이들이 될 수 있는대로 정신병자나 영양실조가 되겠금 답변을 작성해 주세요”(공산주의와 종교문제연구회 편 ‘일본판, 수용소열도’선본사, 407페이지)라고 써져있어, 통일교회를 얕보려는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정보가 왜곡된 것입니다.

    이 정보를 가지고 국회에서 질문을 한 사회당원(당시)에 대해, 통일교회 측은 조사결과에 해당되는 개인명을 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알려진 개인명은 “실종자32명” 중 3명, “심리적이상자49명” 중 6명 뿐이었습니다.게다가 해당자를 추적조사한 결과, 그 정보는 “사실무근”이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동서, 407~413 페이지)

    이러한 무책임함이 밝혀진 후에도 “반대부모의 모임”은 유사한 사실무근한 정보를 계속해서 유출한 것입니다. 참으로 악질적입니다. 그런데 그 실태를 모르는 부모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허보(虛報)에 놀아나게 되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허보로 인해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불안감에 떨고, 통일교회 신자를 감금해서라도 탈퇴시키려고 했겠습니까?

    반대파들은 80년대 이후에도 부모들은 불안감에 빠뜨리는 정보를 계속 유출해, “통일교회는 무섭다”라고 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예를 들어, 1987년 7월 21일, 히로시마대학 교수가 학부장실에서 살해당한 사건에서는, 매스컴은 “통일교회원 범인설”를 유포했습니다.

    아리타 요시후 씨는 같은 해 8월 7일호 “아사히 저널”에서 “히로시마대학 오컬트 살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해, 통일교회의 우호단체 “원리연구회”와 사건을 연관시켜 “아사히신문 한신지국(阪神支局) 습격사건과 더불어, 불길한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기를... 범인체포를 기대한다”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아리타 씨는 같은 해 5월의 “아사히신문 한신지국습격사건”에 대해서도, 97년 5월 15일호 ‘주간문춘’에서, 적보대(赤報隊)=통일교회설을 전개해, 통일교회를 범인취급하고 있습니다.)

    히로시마대학교수 살인사건은, 동년 10월 2일 범인이 체포됨으로써 통일교회의 “무고”가 입증되었으나, 당초 통일교회와 관련시켜서 떠들어놓고, 범인체포 후 통일교회에 대한 사죄보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의 나쁜 이미지 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수법의 보도는 90년대에 들어도 계속 이어져 94년 2월, 반 통일교회 활동가인 탁명환(卓明煥) 씨가 자택 앞에서 살해 당한 사건에선 “배경에는 통일교회가”라는 풍문이 나돌았습니다. 범인체포로 통일교회의 무고는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편승하여 통일교회를 비판하고(”크리스찬신문” 94년 3월 6일호), 사건에 통일교회가 관여했다는 식의 취급이었습니다.

    또 95년 3월의 옴진리교에 의한 “지하철 사린사건” 때도, 옴진리교와 통일교회는 전혀 무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반 통일교회인 오노 츠요시(小野毅)변호사는 “(옴진리교에는)통일교회인이었던 사람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무근한 정보를 언급하는 등, 양자를 일부러 연결시키려는 악의의 보도를 했습니다(”주간현대” 95년 5월 27일호).

    그외에도 세계일보 전 간부인 후쿠시마 요시카즈(副島嘉和) 씨가 84년 6월에 폭행을 당해 부상을 입은 사건, 2000년 말에 발생한 “세타가야 일가살해사건(世田谷一家殺害事件)”도 통일교회 범행설을 천연덕스럽게 언급하고 있습니다(95년 1월호 “마르코 폴로”아리타 씨의 기사 및 02년 3월호 “신초(新潮)45” 이치하시 후미야(一橋文哉) 씨의 기사 등).

    이렇게 반대파는 흉악사건과 통일교회를 연관시키는 악의의 정보를 계속 발신함으로써, “영감상법”보도와 더불어 통일교회의 나쁜 이미지를 구축해 나온 것입니다.


  13. 전 신자는 “통일교회에 속았다”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만 무엇을 가지고 “속았다”라고 하는 것일까요? 통일교회는 정말로 사람을 속이고 있는 걸까요?

    A13. 전 신자들이 “속았다”라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에 교리문제가 깊이 관계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전 신자는 반대파 목사한테 탈퇴설득을 받은 결과, 통일교회의 가르침을 못 믿게 되어서, “속았다”라고 말하는 것이지 통일교회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파 목사의 반 통일교회의 동기에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종교상의 교리문제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의 근간에 있는 “십자가속죄(十字架贖罪)”의 문제입니다.

    통일원리에서는 십자가는 본래 있어야 할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예수님이 살아서 승리해, 이상가정, 지상천국을 만드는 데 있었으나, 당시의 유대교가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살해 당한 결과, 영적 구원 만으로 끝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반대파 목사는 이 가르침을 “십자가에 적대”(빌립보 3장 18절)하는 “사탄의 가르침”이라고 비판해 왔습니다.

    기독교가 십자가에 집착하는 이유는, 구원의 근거를 십자가에 두기 위해서입니다. 그 십자가를 빠뜨리면 구원의 근거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통일교회의 존재자체를 사탄적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대파 목사들은 성서를 이용해서 “십자가는 절대예정이다. 당신은 속고 있다”라며 통일교회신자를 설득해, 탈퇴를 강요해왔습니다.

    기성의 기독교가 어떤 관점에서 십자가의 구원을 믿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 통일교회를 만나, 신앙을 갖게 된 신자일 경우, 반대파 목사가 성서를 이용해서 행하는 교리비판에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선서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 “십자가는 절대예정이다”라는 기성 기독교의 생각에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복음서에는 예수 스스로가 십자가를 예고하고, 그 십자가의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언급한 성구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통일교회의 십자가 해석과 정면적으로 대립할 거라고 생각되는 기술(記述) 입니다. 반대파 목사는 이러한 성구를 이용해서 통렬한 교리비판을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신자는 반대파 목사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될지 혼돈되고, 나중에는 탈퇴하고 맙니다.

    이렇게 목사의 설득으로 “나는 속고 있었다”라고 판단하게 된 전 신자는, “통일교회의 배후에 사탄이 있다”라고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19세기 이후, “예수전 연구”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생애는, “역사적 사실에 따라서 충실하게 기록된 것은 아니고, 그것은 케리그마(선교)의 예수상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성서비평학에 있어서의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즉 십자가가 절대예정이라는 기술은 “십자가속죄”를 명확히 언급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예수에 관한 전승을 모은 복음서기자가, 십자가사건 이후 그 사건을 회상하며, 예수의 수난의 생애를 변증적으로 논증하면서 쓴 “사후예언”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모르는 신자일 경우는 반대목사의 교묘한 설득에 의해서 탈퇴하게 되는 케이스가 많고, 그것이 “속고 있었다”라고 하는 발언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상의 교리논쟁의 문제이고, 절대 통일교회가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 신자가 “속았다”고 말하고, 그것이 매스컴에서 보도됨으로써, 통일교회는 무섭다고 하는 이미지와 어울려서, 어떤 사람이든지 속이는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특수수법을 이용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으로 인식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둘러싼 교리논쟁의 문제에 대해서는, 오오타 도모히사(太田朝久) 저 “짓밟힌 신교의 자유”(광언사)231~245페이지에 나와 있기 때문에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14. 반대파는 장기간 동안 통일교회가 “피가름”을 하고 있다며 비판해 왔습니다만, 진상은 어떻습니까?

    A14. 반대파가 탈퇴설득을 할 때 이용하는 통일교회 중상 중 하나에, 소위 “피가름”이 있습니다. 1975년에 출판된 야마구치 히로시(山口浩) 저 “원리운동의 정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습니다.

    “‘피가름’의 방법은 무엇이냐면, 교조가 헌혈한 피를 받는 것은 아니다. 조직폭력 세계의 형제계약을 하듯이 서로의 피를 마시는 것도 아니다. 교조님하고 섹스를 함으로써 “피가름”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조님하고의 “피가름”은 여성 밖에 못한다. 그 여성한테 이번엔 남성이 피를 나눠받고, 이렇게 남→여→남, 이런식으로 번갈아서 하는 것이다”(144페이지)

    저널리스트인 야마구치 히로시 씨의 설명에 의하면, 통일교회에서는 “섹스 릴레이”를 실천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무근입니다. 납치감금을 당하고, 반대파 목사의 설득으로 탈퇴한 전 신자들 중에도 그런 경험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몇 개 있는 영적집단 , 예를 들어 우명식(禹明植) 집단 같은 데서는, 우 씨가 복수의 여성들과 자녀를 만들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그러한 집단은 “절대순결”을 가르치는 통일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일본 신자 중에 그러한 경험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한국에서 오랫동안 신앙해 온 간부인 36가정 만이 “피가름”을 실천하고 있었다고 비판하는 반대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0년 4월에 출판된 가와사키 교코 저 “통일교회의 정체”에는 “처음의 3쌍과 33쌍은, 실제로 문선명 씨의 피가름을 받았다고 지적 받고 있다”(235페이지)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93년 10월 27일짜 모 방송국의 와이드 쇼에, 36가정인 전 신자 및 “피가름”비판의 전문가인 탁명환 씨가 출연했을 때, 사회자가 “문 교조와 피가름을 한 사실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36가정인 전 신자는 “우리들한테 ‘피가름’은 행해지지 않았다” 라고 부정했을 뿐 아니라, 오랫 동안 “피가름”을 비판해 온 탁 씨조차도 “통일교회는 교리적으로 섹스교리이지만, 지금까지 실제로는 증거가 없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즉 반대파의 “36가정까지는 피가름을 했다”라고 하는 비판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던 것입니다. (최근에는 “3가정 만”이라고 비판하는 반대파도 있으나, 이 또한 사실무근입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계속해서 비판해 왔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고, 반대파의 “악의”에서 오는 풍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납치감금에 의한 강제개종의 수법을 만들어낸 모리야마 사토시 목사의 “피가름”비판의 근거는 바로 탁명환 씨의 정보입니다.

    모리야마 목사의 저서에는 “피가름”이 단정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그 정보의 근거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74년 10월 12일호 “크리스트신문”을 읽어보면, 소위 “피가름”의 정보 제공자가 탁 씨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모리야마 목사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채 “피가름”을 말하던 탁 씨의 발언을 그대로 믿고, 마치 자기가 직접 본 것처럼 “피가름”비판을 단정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무책임합니다.

    명예훼손에 걸릴 가능성이 있는 정보에 대해서 집필할 경우, 그 정보가 과연 사실인지 어떤지에 대한 뒷받침을 찾아서, 최대한 신중하게 기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탁씨 본인이 “증거는 없었다”라고 태연한 태도로 발언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피가름”에 관한 비판이 얼마나 악질적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단순한 풍문으로부터 시작된 “피가름”비판을 들음으로써, 수많은 신자들이 본인들은 본 적도, 체험한 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판소리에 놀아나 탈퇴하고 말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15. 통일교회 측은 “피가름”을 부정하나, “타락론에서 가르치듯이 타락의 경위가 모두 성관계였다면, 이를 회복(복귀)하기에는 거꾸로된 성관계에 의한 경위가 필요하다. 그래서 “피가름”을 틀림없이 하고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반대파의 비판을 들었습니다.어떻게 생각하면 될까요?

    A15. 이러한 추악한 생각과, 유언비어(流言飛語)를 퍼뜨리고 있는 사람은 아사미 사다오 (淺見定雄) 씨입니다. 아사미 씨는 “통일교회 보디컨트롤의 공포”(가모가와출판) 속에서, 천사장 누시엘을 L, 해와를 E, 아담을 A로 표기해, 통일교회에는 “섹스로 거꾸로 청산”한다는 가르침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사악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타락의 경위가 L→E→A, 이렇게 모두 성관계였다면, 이것을 회복(복귀)하기 위해서는 이것과는 반대의 성적 경로가 필요하다. 타락천사 누시엘이 해와를 더럽히고, 그 다음으로 해와가 아담을 더럽혔다면, 반대로 새로운 “무원죄(無原罪)” 누시엘(L’)이 깨끗한 섹스로써 인간의 여성(E’)을 씻겨주고, 그리고 나서 깨끗해진 여성이 남성(A’)를 씻겨주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이론대로라면, 예수는 원래 “제2 누시엘”이어야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처음의 누시엘이 섹스로 더럽힌 인간의 여성을 섹스로 “거꾸로 청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6페이지)

    아사미 씨의 해석이 어긋나게 되는 이유는, 아사미 씨가 “원리강론”을 포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사미 씨는 타락론의 요점인, ①천사장 누시엘과 해와의 영적타락의 문제가, 단순한 “성관계”를 맺었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고, 부부가 되었어야 할 관계도 아닌데도,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하는 “창조원리에 어긋나는 행위”였다는 점, ②그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자기중심의 사랑”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 중대한 2가지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중요점을 간과할 정도면, 타락론은 커녕 통일원리의 기초 조차 모르고 있다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리강론”에서는, “아브라함은 그의 처(妻) 사라를 남매의 입장에서 바로의 아내로 빼앗겼다가 하나님이 바로를 징계하시어 다시 그 아내를 찾아오는 동시에, 데리고 갔던 조카 롯과 함께 많은 재물을 취해가지고 나왔었다. 아브라함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서, 아담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이러한 섭리노정(攝理路程)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한국어판 289페이지)라고 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 10절 ~13장 1절의 이야기를 해석한 것입니다.

    【그림1】

    복귀섭리의 중심인물인 아브라함은, 아담의 입장을 탕감하는 인물로서, 일단은 천사장의 입장을 상징하는 바로에게 아내 사라(여동생의 입장)를 빼앗길 뻔하다가 다시 사라를 되찾는 노정을 걸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가정에서 일어난 타락의 내용을 반대의 경로로 탕감복귀하는 노정이었다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그림1】참조), 아담의 입장을 탕감하는 아브라함은 아담 그대로인 것이고, 또 천사장의 입장인 바로 역시 천사장 그대로인 것이어서, 그것은 영적타락을 할 때, 부부가 되지 말아야 할 두 사람 (천사장과 해와)가 “불륜의 사랑” 관계를 맺고 타락했기 때문에, ①반대로 사라(=해와)가 바로(=천사장)와 “불륜”하지 않고 “창조원리적 상대”인 남편 아브라함(=아담)한테 돌아온 ②사라는 남편의 생명과 자기의 정조(貞操)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중심적 동기”가 아닌 “하나님을 중심한 목숨을 거는 심정”을 가지고, 거짓 사랑으로 인한 “유혹”의 시련을 극복한 것입니다.

    즉 타락이 “불륜의 문제”였기 때문에 “불륜을 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서는 타락이 “자기중심의 동기”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이번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동기”를 가지는 것. 이렇게 반대의 길을 걸어간 아브라함의 노정이야말로 복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사미 씨가 말하는, “예수는 제2의 누시엘”이라든지, 제2의 누시엘인 메시아가 섹스로 “거꾸로 청산한다”라고 하는 유치한 말은, 통일교회에서는 전혀 가르치지도 않는, 아사미 씨의 사악한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사미 씨는 통일교회의 기초도 모르면서, “통일교회의 가르침은 이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6. “문선명 선생이1935년 4월 17일, 예수님한테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만든 이야기다. 통일교회의 출판물도 어긋나는 부분이 많고, 참으로 무책임하다” 라고 하는 반대파의 비판을 들었습니다. 진상은 어떻습니까?

    A16. 성서를 둘러싼 교리비판은, 결국 어느 쪽의 해석을 믿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도 나는 통일원리를 믿는다”라고 통일교회 신자가 주장하게 되면, 탈퇴설득에 시간이 걸리고, 쩔쩔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 씨는 ‘피가름’을 하고 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 등, 인격비판으로 설득해 나가면 보다 효과적으로 탈퇴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반대파 목사가 말하는, 문선명 선생을 불신하게 하기 위한 비판 중 하나가, 소위 “부활절문제”입니다.

    탈퇴한 야마자키 히로코 씨는 “그 날은 부활절이 아니었다”라고 하는 반대파 목사의 설명에 충격을 받아, 문선명 선생을 불신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문선명 씨는 1935년 4월 17일, 부활절에 예수님의 영이 나타나,

    ‘내가 하다가 못한 일을 성취해주기를 바란다’

    라고 하는 계시를 받았다――이렇게 우리는 배워왔다.

    그러나, 그 날은 부활절이 아니다. 모든 기독교에서는 춘분 날이 지나고 보름달 밤을 맞이하고 난 뒤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하고 있다. 그 해의 4월 17일은 일요일이 아니었다.

    반대파가 그것을 비판하자, 그 날은 통일교 식의 부활절이라고 한다. 아직 통일교회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시대에 통일교회가 부활절을 정한다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다. 그 이후로, 통일교회에서는 매년 4월 17일을 부활절로 정한 것 같다. 또 최근의 강의에서는, “부활절 때”라는 보충설명이 삭제되고 있다”(“사랑이 거짓으로 끝날 때” 195~196페이지)

    야마자키 히로코 씨가 말하는 것처럼, 35년 4월 17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수난주(受難週)의 수요일이었습니다. (35년의 부활절은 4월 21일) 그러나 그 날이 기독교에서 축하하는 부활절이 아닌 것을 가지고 문선명 선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78년 10월 14일에 한국에서 출판된 “통일교회사” (성화사)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16세가 되신 해의 부활절, (35년)4월 17일의 일이었다. 이 날이 진정한 부활절이라는 것도 이 때 선생님은 처음으로 아신 것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셨을 때, 처음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지키는 부활절 기념일은 해마다 다르다. 그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 언제인지도 모르겠고, 부활절에 대해서도 조사할 방법이 없어서, 서력 325년, “니케아공회의”에서 ‘춘분날 뒤에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자’라고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즉 기독교 자체가 부활절이 언제인지를 모르고, 명확치 않은 시대가 어느 기간 있다가 AD 325년의 회의에서 결정한것이 현재 기독교에서 지키는 부활절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지키는 부활절은 정확한 예수의 부활일인지 확실치 않은 것입니다.

    문선명 선생은 예수님한테 “4월 17일이 진정한 부활절이다”라는 알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 내용이 일본에 정확하게 전달 안 되었기 때문에 “부활절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여러가지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을 조사해보니까 반대파가 그 모순을 지적하는 대로, 출판물 상호 간에 크나 작으나 어긋나는 부분이 복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잘못이 생긴 것은, 계시(啓示)에 관한 정보가 일본에 들어올 때, 단편적으로 전해진다던가, 아니면 잘 못 받아들인다던지, 더 나아가서, 한국과 일본의 풍습의 차이에 관한 문제도 거기에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문선명 선생이 16세 때 계시를 받으셨다”라고 들은 사람이, 한국사회에서는 보통 나이를 “세는 나이”로 말하는 것을 몰랐을 경우, 단순히 태어난 해인 1920년에다가 16년을 더해 “1936년”이라고 오해해버린다든지, 또는 “문선명 선생이 계시를 받은 4월 17일이야말로 진정한 부활절이었다”라고 하는 내용이 약간 변화되어 “문선명 선생은 4월 17일의 부활절에 계시를 받았다”라고 전달되어 버린다든지, 이런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보에 어긋나는 부분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 정보전달의 잘못을 반대파가 따지고, 감금현장에서의 탈퇴설득의 재료 중 하나로 이용(악용?)하게 된 것이, 부활절문제의 진상입니다.

    초대교회시대에도, 복음서를 비롯해 신약성서의 각 문서 안에 모순이 있고(4개 복음서간에도 모순이 있다), 그것을 유대교 측이 “기독교의 각 문서는 자기모순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만, 반대파 목사의 행위는 그것과 똑같습니다.


  17. “문선명 씨가, 박정화 씨를 업고 바다를 건너가고 있다는 사진은 본인이 아니다. 미담을 만들어서라도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 재림주일 리가 없다” 라고 하는 반대파의 비판을 들었습니다. 진상은 어떻습니까?

    A17. 반대파 목사가 탈퇴설득에 사용하는 자료 중 하나에, 문선명 선생이 바다를 건너가는 모습이라고 알려져 온 사진이 있습니다. 박 씨란 문선명 선생이 북조선의 흥남감옥(덕리특별노무자수용소)에서 고역하시던 때에, 꿈에 나타난 노인의 인도에 의해서 문선명 선생을 재림주로 믿고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1950년 10월 14일, 문선명 선생은 UN군에 의한 폭격으로 해방되어, 평양에 있던 제자를 찾아가십니다. 그 때, 박 씨는 다리가 부러져 있어서, 평양시내에 피난명령이 내려졌을 때, 도망가는 데 방해가 된다고 해서 가족한테 조차 버림 받았습니다. 그러한 박 씨를 문선명 선생은 버리지 않고 구출하신 것입니다.

    같은 해 12월, 문선명 선생은 다리가 불편한 박 씨를 자전거에 태워, 김원필 씨와 함께 부산을 향해 남하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용매도(龍媒島)라는 섬에서 인천으로 직행하는 배가 나간다는 것을 알고, 박 씨를 업고 여울을 건너가신 것입니다.

    반대파 목사들이 비판하는 사진은, 원래 한국의 “중앙일보”에 기재된 이승만 대통령 부인의 회고록에 나와 있던 것이고, 그 사진은 박 씨를 업고 바다를 건너가시는 문선명 선생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습니다(83년 10월 24일 “중앙일보”).

    84년 5월9일, 일본에 온 박정화 씨는 토쿄 본부교회에서 “이 사진은 저와 문 선생님입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그 후에 나고야, 다카라즈카, 큐슈 등을 순회한 것입니다. 당사자의 증언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전혀 의심할 것 없이 그 사진을 “문선명 선생과 박 씨의 사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사진은 문선명 선생과 박 씨의 사진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사진이 발견되고, 박 씨가 일본에 왔었던 84년 당시는, 문선명 선생이 미국에서의 재판으로 댄버리 수감이 확정될까 말까 하는 시기였고, 문흥진 씨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지 몇 달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 사진의 발견이 얼마나 통일교회 신자들을 위로했으며, 힘이 되었겠습니까. 곧바로, 그 희소식은 통일교회 전체에 알려졌습니다.

    반대파 목사들은, 감금 장소에서, 그 사진을 통일교회 신자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은 문선명이 아니다. 문 씨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라며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선명 선생이 거짓말을 한 것도, 통일교회가 속이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사진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비슷했으며, 당사자의 증언도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버린 것입니다.

    비록 이 사진이 문선명 선생과 박 씨가 아니라 하더라도, 문선명 선생이 다리가 불편했던 박 씨를 내버려두지 않고 남하했다는 사실이 부정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리가 부러진 박 씨가 남녘 땅에 도달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의 유체를 감쌌다고 하는 이태리의 토리노에 있는 성해포(聖骸布)도 그 진위가 심의되어, 어떤 사람은 “가짜다”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만일에 성해포가 가짜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부정 당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사진 문제는 이것과 같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8. “‘원리강론’의 성구(聖句) 인용은 엉터리이다. 이런 것이 진리일 리가 없다” 라고 하는 반대파의 비판을 들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A18. “원리강론”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성구인용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표현상의 완성도 수준”문제이고, 통일원리의 내용을 보다 알기 쉽게 설명하려는 의도로 인용한 성구가 결과적으로 적당하지 않았다는 것이어서, 통일원리의 이론 그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유대교 측에서도 추궁하는 “구약성서에서의 성구 인용문제”가 신약성서에도 있어서, 기반이 없었던 초창기의 초대교회 사람들은 당시에 압도적인 기반을 자랑하고 있던 유대교도들한테 “너무도 무책임한 성구 인용, 왜곡…” 이라고 비난 받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약 성서가 품고 있는 “성구 인용문제”에 대해서 데무라 아키라(出村彰)?미야타니 요시치카(宮谷宣史) 편 “성서해석의 역사”(일본기독교단 출판국)에서 하시모토 시게오 씨 (동지사대학 신학부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있어서의 구약성서의 성구 이용은 상술한 바와 같이 유대교와 공통된 해석이 의식적 검토 없이 채입(採入)되어 있고, 게다가 이는 전승되는 각 단계에서 일관된 것도 아니었다. 또 구약인용의 기본목적은 예수의 사건이 인간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구제의 사건이며, 구약 말씀의 성취임을 보이는 데에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을 전제로 해서 그런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임으로, 역으로 구약을 깊이 읽다 보면 자동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도달한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케리그마의 정당성을 변증하기 위한 구약인용임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는 모순과 문제를 내포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67페이지)

    또 하시모토 시게오 씨는 “신공동역?신양성서주해(注解)1”(일본기독교단 출발국)의 “마태전 주해”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마태전 기자)는 스스로의 신학의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구약을 이용해 놓고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적당하게 변경을 가하고 있다. 즉 그에게 있어서 이를테면 구약성서는 크리스트론을 위한 도구화가 되어 있다. 이런 식이면 과연 유대교를 설득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질 것이다. 실제로 유대교도들은 기독교 측이 구약성서를 적당히 이용해, 부정확한 구약 본문으로 유대교를 공격하는 것을 오랫동안 탄식하게 되고, 그 후에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신개역(아퀼라譯/Aquila)을 만들게 된다”(37~38페이지)

    이렇게 현재 반대파 목사들이 “원리강론”을 비판하는 것과 똑같이 신약성서에 인용된 구약성서에서부터의 인용 또한, 유대교도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무책임한 성서의 인용, 왜곡…”이라고 비판 받을만한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반대파 목사들은 자기들의 정전(正典)인 신약성서에 내포된 동일한 문제점은 숨겨놓은 채, 통일교회원을 탈퇴시키기 위해 “원리강론”의 성구 인용문제를 자기들 입맛대로 찾아서 탈퇴설득을 위해 이용(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19.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리강론”은 삭제와 부가, 문구를 바꾸는 등 바꾸고 있다. 이러한 것이 진리일 수가 없다”라고 하는 반대파의 비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요?

    A19. 반대파 목사는 “원리강론”에 대해서 “한국어로 된 “원전(原典)”에는 있는데, 일본어판에서는 삭제된 부분이 있고, 개정판에서는 수정한 부분도 있다. 진리는 영원불변한 것임으로, 변경한다는 자체가 “원리강론”이 진리가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라고 비판합니다.

    물론 한 때 “원리강론”에 삭제된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교상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고, 또 “재림론”에는 유사한 성구(聖句)인용부분이 있어서 같은 페이지에 있는 두 성구 사이에 있었던 문장에 대한 번역이 결락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락에는 번역기술의 미숙으로 인한 문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어판 “원리강론” 23페이지에, 한국어판에는 “한 목적”으로 표기되어 있는 부분이 “하나님의 목적”으로 오역된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은 유사한 문제가, 신양성서의 성립과정에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때문에 통일교회가 불성실하고, “원리강론”이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기독교도 불실한 종교가 되고, 신약성서는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비판이 똑같이 성립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기독교의 정전(正典)인 “신약성서”의 편찬과정을 살펴보면 “원리강론”과 같은 사정이 있었다는 역사적 경위가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원전은 원래 그리스어입니다만, 라틴어로 번역된 성서는 일찍이 4세기 시점에서 사본이 이루어질 때마다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고, 결국엔 AD381년, 교황 다마소 1세가 히에로니무스(347~419)에게 라틴어 성경의 교정을 어쩔 수 없이 명령할 정도였습니다.

    또 원전인 그리스어 성서 자체도 대단히 혼란에 빠져 있고, 현대에 이루기까지 참된 원전을 부원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본문비판”이 계속해서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 최신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출판되는 네스트레 어란트의 그리스어 성서는 벌써 28판 째가 나오려고 합니다. 그 신약성서에는 수많은 사본의 “이독(異讀)”이, 란외에 각주(脚注)로서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그리스어 원전의 사본이 얼마나 혼란에 빠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신약성서에 선교상의 배려로, 한 때 삭제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으로서 요한복음 8장 “음란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태복음에는 14장3절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의 “빌립”이라는 이름이 틀렸기 때문에, 5세기경의 후기 필기자(베자사본)는, 이 이름 자체를 삭제하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서 그 자체가 여러 자정을 품고 오늘날까지 전해져온 것입니다. 즉 바꿔쓰기, 더해쓰기, 아니면 삭제라고 하는 행위가 지금까지 행해져 왔고, 시대나 환경과 더불어 변천되어 온 것입니다. 반대파 목사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통일교회 신자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야마자키 히로코 (山崎浩子) 씨를 탈퇴 설득할 때, “원리강론”을 비판한 반대파 목사는 “진리란 흔들리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것이란 뜻이지요” 라고 정의해, “흔들리고 움직이고 있는 “원리강론”은 진리가 아니다” 라고 비판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말하면 “성서 또한 진리가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오고 맙니다.

    기독교는 성서를 “신의 계시”로 믿고 왔습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성서의 글을 “진리”와 동일시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성서비판학이 급속도로 진전해, 성서 안에 상호모순과 기술오기(記述誤記)가 있다는 것이 지적받게 되고, 예수가 말했다고 기록된 부분에 조차도 그릇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성서비판학이 진전함에 따라 “성서는 틀렸다” “진리가 아니다” 라며 신앙을 잃어버리는 크리스천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반대파 목사들은 말하자면 동일한 수법으로 통일교회 신자의 신앙을 흔들리게 하고, “원리강론은 틀렸다” “진리가 아니다” 라고 함으로써 신앙적 파괴공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탈퇴설득으로 신앙을 잃은 통일교회 신자는 통일교회를 심하게 증오하게 되고, 재판투쟁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의 문제점은 무시해 놓고, 통일교회 비판에만 몰두하는 반대파 목사들에게 ‘악의적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고, 불성실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 기교(棄敎)목적으로 친족들이 범하고 있는 납치감금사건들을, 지금도 여전히 단속을 않는 일본은 “신교의 자유”가 확립되지 않은 국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서구각국에서 “신교의 자유”가 확립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A20. “신교의 자유”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성문(成文)화된 것은 1791년11월3일, 미국에서 제정된 “헌법수정 제1조”였습니다. 이 헌법수정 제1조는 신교의 자유를 논하는 데 있어 절대 빠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헌법수정 제1조”는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규정하고 있고, 이것을 쉽게 말하면, 소수파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①국가는 특정한 종교를 공인해서는 아니 됨 (혹시 만약에 특정한 종교 만을 공인한다면, 비공인 종교는 탄압의 대상이 될 수가 있음), ②국가는 종교상의 예배, 언론 및 출판의 자유를 금하거나, 인민이 평온히 집회를 가지는 권리를 침해하는 등의 법률을 정해서는 아니 된다, 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헌법수정 제1조”가 제정된 배경에는 사상, 언론, 결사 등의 자유를 둘러싸고, 가톨릭 교회, 영국국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서로 배척, 탄압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친족 간에 신앙문제를 둘러싸고 싸우는 등의 비극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실을 또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깊은 반성에서부터 기인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퓨리턴(청교도)가 태동하기 지작한 16~17세기의 영국에서는 “수장령(首長令)”을 내린 헨리8세 이후 왕위계승권 쟁탈전에 신앙문제가 걸려 왕실 내에서 왕족들을 중심으로 가톨릭이냐 프로테스탄트냐, 아니면 중도(국교회)냐를 둘러싸고 각 진영이 불꽃 튀는 싸움을 했습니다. 특히 메리 1세(1553 ~58재위)의 치하에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에 대한 “스미스필드의 대학살”은 처참한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유럽대륙을 보게 되면 독일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에 의한 “30년전쟁”에서 다수의 국민이 희생이 되었고, 약1600만명의 인구는 600만명까지 감소되었습니다 (워커 저 “기독교사③종교개혁” P202). 프랑스에서는 위그노(칼뱅 주의자)를 탄압한 “위그노전쟁”에서 국토가 완전히 황폐해졌고, 특히 1572년 8월에 일어난 “성 바르톨로뮤의 학살”에서는 약 만명이 학살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통이단논쟁(正統異端論爭)에 따른 종교탄압으로 인해 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신교의 자유를 찾아서, 스위스나 홀란드, 영국 등에 망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도 그들에게 안주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곧이어 그들 가운데서 신대륙 미국에 이주하기 시작하는 그룹이 나타납니다.

    그 대표자들이 메이플라워호의 필그림 파더스들입니다. 그외에도 잇달아 유럽 각지에서 신교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건너간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종다양해서, 가톨릭의 탄압을 당한 프로테스탄트 이외에, 역으로 프로테스탄트의 탄압을 당한 가톨릭 교도도 포함되어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메서디스트파, 뱁티스트파, 퀘이커파, 메노파, 그리고 유대교도 등, 다양한 종파의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미국은 종교의 도가니가 되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신교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건너간 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땅에서 또 다시 슬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17세기의 “세일럼의 마녀사냥”입니다. 가장 과격했던 1692년에는 겨우 3개월 사이에 20명의 사람들과 2마리의 개가 마녀로서 처형당한 것입니다(소네 아키히코(曾根曉彦) 저 “미국 교회사” P69).

    참사랑으로 서로 서로 믿고 존중하면 좋습니다만, 교리 만을 앞세우면, 곧이어 보기 흉한 종교 간의 싸움이 되고, 이단심문(異端審問), 마녀사냥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친족간이라 하더라도, 사상, 믿음의 차이로 서로가 싸울 일이 없도록, 소수파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정해진 것이 “헌법수정 제1조”였던 것입니다.

    예수가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2장 52절 ~53절)라고 말씀하셨듯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는 그 여부를 둘러싸고 친족 끼리도 분쟁과 대립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배움으로써 똑같은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가령 친족간이라 하더라도 기교(棄敎)목적으로 납치감금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임을 명확히 하고 선처해야 할 것입니다.

    4000건을 넘는 피해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시하는 일본정부는 국제사회의 리더국의 일원으로서의 자질에 큰 의심을 받게 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전국납치 감금 강제 개종 피해자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