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경찰청장관한테 호소했음에도 무시당해

남편과 당시 1살 장녀를 납치당해, 가족이 갈라져버린 T씨의 고통

1999년 11월13일, 도쿄도에 사는 S씨(당시32세)가 당시 1살 반이었던 큰 딸과 함께 사이타마의 친정으로 하루만에 돌아올 예정으로 떠났다가, 그 후에 반년이 지나도 그는 자택으로 돌아오기는 커녕 전화 한 통도 오질 않았다.

S씨의 “실종”에 남편의 가족이 관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S씨의 부모는, S씨 부부가 통일교회의 국제결혼식에 참가하여, 결혼한 것에 강하게 반대했었다. 아내는 혼약중 시댁 문턱을 넘는 것 조차 허락 안 되었었다. 장녀가 태어남으로 시부모의 태도도 약간은 부드러워진 것으로 보였으나, 그래도 시댁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1998년 10월 중순쯤, S씨가 교회에서 발행된 소책자를 보냈더니, 모친한테 전화가 오기를 “보내준 소책자를 봤는데,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니까 다음에 집에 와서 직접 설명해 달라” 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조금이라도 부모의 이해를 얻고 싶다고 늘 생각했었던S씨는 11월 13일에 간다고 전했다. 그날 밤, 남편이 집에 안 들어오자 아내인 T씨는 사이타마의 친정에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때 임신하고 있어서 몸이 힘들었기 때문에 지인에게 부탁을 해서 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친정까지 찾아갔다. 전날에는 “가족 모두가 모인다”고 하던 집은 문이 잠겨 있었고, 빈지문(비바람을 막기 위한 문)까지 닫혀 있었다. 그날의 석간지도 편지함에 들어 있었다.

그날 심야에 남편 부친한테 전화가 와서 “S하고 대화중이다” 라고 말하자, T씨는 남편의 수첩에11월14일 이후의 일에 관한 일정이 이미 잡혀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대화는 남편이 미리 수락하던 것은 아니다”라고 반론했다.

T씨는 마음을 먹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15일에는 경잘서를 찾아가, 남편과 딸의 “수사신고”를 냈다. 남편 직장에도 연락해서 무엇인가 움직임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남편의 부친에게도 내용증명우편을 송부했다.

“저는 임신 6개월이어서 남편의 도움 없이 생활하기는 어렵고, 또 남편은 스트레스에 약하고, 신경이 가늘기 때문에 가끔가다 가슴의 아픔을 호소해 통원하던 경위도 있어, 이러한 증상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딸은 감기가 들어 병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일각이라도 빨리 남편과 딸을 해방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그라고 남편과 딸의 의류와 약, 인형 등을 친정으로 보냈다. 또 친정에 어느새 설치된 음성메세지에 메세지를 녹음해놨다. “남편과 딸을 빨리 돌려주세요!”

실종된지 2주가 지났을 때, 남편 부친한테 “이 대화는 쉽게 안 끝날 것이다”라고 하는 속달편지가 왔다. 어디 있고,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 T씨가 알고 싶은 정보는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았다.

그 당시의 T씨의 정신상태는 어떤 것이었을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설명하는 T씨. 전차를 타면 이 전차를 타고 남편과 딸은 친정으로 갔구나 생각이 들어,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딸이 생각나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의 모습 조차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남편과 딸이 납치 당한 지 40일이 지나, 거리에는 크리스마스의 번화한 분위기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T씨의 마음은 어두웠다. 편지를 쓰면 내용이 어느새 유서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찢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는 편지가 있다.

남편에게 쓴 편지 : “S씨와 딸이 없는 생활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어요. 이제는 견디지 못 하겠어요. 더 이상 살아 있으려면 당신의 부모님을 미워해야 돼요. 그래서 ... 제 존재 자체가 없어지면 S씨의 책임도 가벼워질 것이고 ... 미안해요.

집에 있으면 S씨와 딸의 모습이 상기되어서 고통스러워 우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네요. 우리 딸이 크면 저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세요.

S씨 사랑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몸 조심하고 오래 오래 살아 주기를 바래요. 당신과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당신의 아내로서 살아올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딸에게 쓴 편지 : “미안해. 엄마는 너가 커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주고 싶었는데... 난 너가 태어났을 때 첫 울음 소리를 들었던 순간, 감동으로 눈물이 나온 것을 기억하고 있단다. 너가 목을 가누게 되었을 때, 기어다니기 시작하고 잡고 서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걸어다녔을 때의 모습 하나 하나가 예뻐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단다. 유아원에서도 여러 선생님들한테 기염받는 너가 엄마의 자랑이었어. 유아원으로 마중을 나가면 항상 뛰어나와서 엄마와 같이 손잡고 계단을 내렸지. 너의 손의 따뜻함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단다. 그런데 설마 너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의해서 이렇게 갈라져버릴줄이야 꿈에도 몰랐어. 엄마는 너의 아빠없이 도저히 못살겠어. 그래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봤지만 이제 한계야. 엄마를 용서해줘. 너를 더 많은 곳에 데려가고 싶었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중략) 제발 엄마 몫까지 힘차게 살아주기를 바래. 그리고 아빠를 많이 도와줘. 너를 만나서 행복했단다. 고마워”

몇 번 씩이나 “죽음”을 결의하면서도 죽지 못했던 것은, T씨 배 속에 이미 자라고 있던 작은 생명 때문이었다. “ ‘난 살아 있다’ 라고 하는 강한 메시지를 보내줬기에 죽기를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T씨는 11년 째에 들어, 우라와 지방재판소에 남편 부모에게 딸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는 가처분신청(假處分申請)을 제출했으나, 상대방이 재판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나카 경찰청장관(당시)에게 상신서(上申書)를 보내기도 했으나, 사태의 진전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큰 딸하고의 생활을 포기 못해, S씨 부모를 상대로 혼인방해와 장녀에 대한 친권침해(親權侵害)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재판을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일으켰다. 남편은 처음에는 가처분신청시와 마찬가지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신청을 하니까 2000년 8월 경, 변호사인 야마구치 히로시 씨와 함께 도쿄지방재판소에 나타났다. 남편이 실종된 후에 만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S씨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분명히 야마구치 씨를 의식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고, 또 재판소 일실에서 둘이서 만 이야기를 할 때도, 작은 소리라도 들리는 장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밖에 있던 야마구치 씨한테 들리게끔 마치 야단을 치듯이 큰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자꾸 달리지고, 만날 때 마다 다른 내용의 발언을 하곤 했다. 사소한 질문을 해도 곧 바로 대답을 않고, 다음 차에 만날 때 변호사들하고 상의한 것 처럼 느껴지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S씨가 교회에 헌금한 돈을 환불하라는 요구를 교회 측에 했을 때도, 배후에 야마구치 씨의 존재가 있음을 느꼈다. 환불 입금계좌로 지정해온 계좌번호가 야마구치 씨의 변호사사무소 계좌였던 것이다.

이윽고, 강제탈퇴를 당한 S씨한테 이혼신청이 와, T씨는 이의를 제기했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의 상호면회 만은 허락을 받아 S씨와 T씨, 장녀, 차녀가 만날 시간은 확보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법률의 전문가인 변호사이고, T씨는 순전한 아마추어였다.

T씨가 제일 실수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조정(調停)에서 정해진 문면 속에 상호면회는 “아이의 성장에 배려해서 행한다”라는 말이 들어 있었던 점이다.

면회를 할 때, 장녀가 누군가가 뒤에서 말하게 하는 것 같은 분위기로 “만나기 싫어” 라고 말했다. 이 한 마디 발언을 근거로 상대방이 “면회는 아이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라며 그 후로 장녀를 못 만나게 되어 버렸다.

남편의 갑작스런운 실종 이후 벌써 10년 세월이 흘렀다.

남편과 장녀가 없어진 실의 속에서 출산한 차녀는 현재 9살. 어릴 때부터 심하게 낫을 가리는 아이였다. 소학교 1학년 때 교회의 합창단에 입단했다. 음악교실의 첫 발표회 때는 엄마 옆을 떠나려 하지 않아, 무대의 피아노 뒤에 엄마와 둘이서 설 정도로 부끄러움을 잘 탔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 앞에서도 당당하게 노래를 부른다. 아이가 선학합창단에 소속되어 있어, 신성에 넘친 아름다운 표정으로 고운 노래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볼 때 마다 T씨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그래서 “이 아이가 성장해서 축복을 받을 때까지 열심히 키워야지”라고 자기자신을 격려하는 T씨. 모자가정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렵다. 그러나 그녀의 슬픈은 다른 곳에 있다.

필자가 “어떤 때가 제일 힘드세요?” 라고 물으니까 T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항상 힘듭니다. 우리 아이에게는 태어났을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아빠가 곁에 없어서, 집안에 아빠가 없는 것에 대한 위화감을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가슴이 아픕니다. 

몇일 전에 교회로 가는 길에 ‘엄마, 아기가 갖고 싶어요. 동생이 갖고 싶어. 낳아줘!’ 라고 해서 당황했습니다. 앞으로 조금 씩 여러 사실들을 알아감에 따라서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T씨는 지금도 남편 성(姓)을 지키고 있다. (※일본에서는 여성이 결혼하면 보통 남편 성을 따라서 성을 바꾼다.)

“언젠가, 그와 딸이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진 가족이, 또다시 함께 사는 것이 제 꿈이자 희망입니다”(T씨)


전국납치 감금 강제 개종 피해자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