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남은 마음의 상처 - 시오타니 도모코

시오타니 도모코라고 합니다. 저는 1992년 8월25일, 한국 서울에서 거행된 “3만쌍 국제합동결혼식”에서 결혼해, 그 후 가정을 이루고 현재는 아이가 3명 있습니다.

저는 2006년 8월 경에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아이를 돌보지도 못하고 집안일도 일체 못하게 되어 깜깜한 터널 속에 있는 듯한 심경을 맛보았습니다. “이 느낌은... 어디선가 맛본 것 같은데...”

13년 전에 체험한 납치감금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잊으려고 해온 과거에 이제 와서 마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납치감금을 당한 저 뿐만이 아니라 그 때 당시 혼약중이었던 남편, 우리 남편 또한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체험담을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금시작〉

1993년12월23일, 저는 가족에게 이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친정에 갔을 때 납치를 당했습니다. 납치를 당한 뒤, 저는 교토에 있는 맨션에 69일간 감금되었고, 또 그 후에 일본 예수 크리스트교단 교토성도교회(京都聖徒敎會)에서 연금을 당하다가 38일만에 탈출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처음엔 친족 소개를 받고 야오루우터교회(八尾luther교회)에 상담하러 가서 거기에서 성경 공부를 권유받아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그 교회에서 교토성도교회의 후나다 다케오(船田武雄)목사를 소개받았습니다. 후나다 목사의 “상담회”에 참가하게 된 부모님은 거기서 후나다 목사한테 지도를 받아 납치감금을 계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어머니의 사촌이자 일본기독교단에 소속하고 그 당시 대만선교사였던 니노미야 이치로 씨도 교토의 맨션에 2주일정도 같이 있었습니다.

납치를 당한 당일의 이야기입니다. 가족의 이발을 끝내고 집을 나가려고 하니까 부모님이 “역까지 같이 가자”라고 해서 같이 집을 나갔습니다. 한 2, 3분 정도 걸어간 곳에서 저는 갑자기 썬글라스를 낀 몇 명의 남녀들에게 둘러쌓였습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무엇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저는 공포심에서 큰 소리를 지르고 도움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강제로 차 안에 떠밀려 태워졌습니다.

제가 탄 차 앞에는 다른 차가 한 대, 그리고 뒤에도 또 다른 한 대가 있었고, 무전기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차를 출발시켰습니다. 보니까 제가 태워진 차의 운전석에는 작은 아버지, 조수석에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양쪽에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제 양팔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교토의 맨션으로 갔습니다. 차를 내리면서도 우리 가족들은 제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양팔을 꼭 잡고 있었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몇 층에서 내리는지 조차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맨션의 밀실에 들어가자 부모님은 현관문을 자물쇠와 쇠사슬로 잠근 뒤 쇠사슬에 또 자물쇠를 걸고, 제 신발도 어디론가 숨겨버렸습니다.

저는 우리 가족들이 이런 짓을 한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고, 너무 억울해서 도저히 평상심으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감금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감금된 맨션 안에서〉

발광상태에 빠진 저에게 부모님은 “도모코, 미안하다. 이렇게 할 수 밖에 방법이 없었단다” 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저는 “이런 짓을 하면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시나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갇힌 방에도 문을 잠궈놨고, 화장실에 갈 때도 아버지가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억지로 연행되었을 때의 충격과 잠잘 때까지 가족들의 감시를 당한 정신적 압박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통일교회에 대해서 알고 싶다”, “통일교회를 잘 아는 목사님 이야기를 들어보라”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했고, 저는 그들과 그때 그때 대화를 나눴으나 아무리 대화를 해도 평행선을 더듬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대화”라고 하는 것은 명분에 불과했고,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 통일교회의 신앙을 버리게 하는 일방적인 행위였습니다. 저는 아무튼 “도망갈 수 밖에 없다”라고 생각해서, 3일 째 아침 새벽 4시경에 베란다 창문을 열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내려가 보니까 거기는 8층이었습니다. 뛰어내릴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옆의 옆 호실까지 울타리를 넘어가서 거기서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그 호실에 사는 사람한테 구조를 청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 들켜서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몇 일후부터 통일교를 탈퇴한 여성과 후나다(船田)목사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통일교회에 관계된 책을 잔뜩 가져와서 “원리강론”의 잘못된 부분 등을 설명하고 갔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방적으로만 비판을 듣는 입장에서 저는 단적으로 말하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부모님이나 반대파 목사 앞에서 반론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후나다 목사가 그랬습니다. 후나다 목사는 통일교회 신자들을, “미친 사람들”,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들”로만 인식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쓴 리포트 속에서, 이번 감금에 대한 면밀한 계획이 적혀 있는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거기에는 저를 어떻게 맨션에 연행할 것인지, 맨션에서의 생활내용, 부모가 취해야 할 태도, 욕실에는 둘이서 들어가는 등의 상세한 지도사항이 쓰여져 있었고, 더 나아가서 제가 “탈퇴신고서”를 쓴 다음의 갱생생활이 필요하다는 내용까지 여러가지 쓰여져 있었습니다.

부모가 목사의 지도를 받고, 그 지도를 전면적으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을 봤을 때 저는 더욱 충격을 받고 “더 이상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겠다”라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서를 보고, 제가 탈퇴를 결심하지 않은 이상은 절대 나가지 못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은 재인식했습니다.

후나다 목사는 제가 감금을 당한 뒤 한 2주일 정도 거의 매일 맨션에 찾아왔습니다. 그 속에서 통일원리 내용과 기존의 기독교 성서해석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비판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문선명선생의 생애노정에 대해서도 비판해, 제 신앙의 모두를 부정했습니다.

저는 마음 속에서 “사람이 계시 받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남이 그것을 갖다가 거짓말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본인의 관계로만 알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마치 문 씨가 완전히 거짓말만 하는 사람처럼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는 목사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거짓말을 하고 여기에 데리고 오게 한 사람은 누구냐! 그것을 지시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는가!” 라고 말했고, 그 모순 덩어리인 목사의 자세를, 저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나가려면 가만히 있다가, 기회를 기다리고 위장탈퇴(僞裝脫退)할 수밖에 없다” 라고 생각해, 반항은 하나도 하지않고 계속 참을 수밖에 없는 날들을 지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부모님이 맨션에서의 제 생활태도를 일일이 목사한테 보고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 억울해서 이불을 물며 하루에 몇 번씩이나 울었습니다.

〈위장탈퇴〉

감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오늘이야말로 통일교회를 그만 두겠다고 말해야지”, “오늘이야말로…” 매일 이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않았습니다.

“정말 위장탈퇴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내가 탈퇴를 선포하고 나서 또다시 교회에 돌아가면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할까…” 이런 생각 때문에 결의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40일이 지난 새벽에 꿈을 꿨습니다 우리 참어머님께서 새빨간 치마저고리를 입고 크게 나온 배를 안고 힘들게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참아버님이 계시고, “오늘은 난산이 되겠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감금되었을 때 당시는, 1600명 수련회가 시작되었을 때였고 일본은 세계를 살려야 할 중요한 사명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저 또한 결의해서 이 상황을 극복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날 밤에, 전에 통일교를 탈퇴한 여성이 찾아와 “지금의 기분은 어떤가요?”라고 저한테 물었습니다. “바로 지금 말해야지…” 저는 죽을 각오로 “통일교회 신앙을 버리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탈퇴선포를 하고 난 뒤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마음은 불안감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제 자신의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낼 수가 없어, 마음이 조금씩 불안정해져가는 저에게 후나다 목사는 참아버님을 중상하는 반대파의 여러 비판서적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은 많이 흔들렸고, 수없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진실의 길을 가고 싶어하는데, 왜 하나님은 나와 가족에게 이러한 고통을 계속 주는 걸까” 라고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누우면서 이불 속에서 “하나님! 당신 앞에 참된 삶을 사신 분은 누구십니까? 당신을 위해서 제일 눈물을 흘린 분은 누구십니까?” 라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질문도 몇차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또다시 꿈을 꿨습니다. 꿈 내용은 제가 참아버님의 등을 밀어드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의 등에는 고문을 당한 흉터가 가득 있었습니다. 박해를 당하시면서 아버님은 어떤 굴욕과 아픔을 겪으셨는가…?아버님은 지옥의 밑바닥에 계셨을 것이다…. 맨션에서의 싸움은 고독한 싸움이었지만 신앙이 어린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어, 꿈을 통해서 저를 보호해주셨습니다.

“끈기를 가지고 끝까지 참아라”라며 아버님이 늘 곁에서 격려하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많은 형제자매들도 꿈에 나타나, 저를 위해서 형제자매들이 기도해주고 있음을 실감해, 그들에게 감사했습니다.

저 혼자였더라면 벌써부터 쓰러져 생각할 기력조차 잃어, 지금쯤은 어떻게 되어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이미 축복을 받아 있었던 것, 그리고 제가 제 속마음을 거의 털어놓지 않는 것 때문에 후나다 목사와 관계자들은 저를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감금행활이 2개월이 지나니까, 답답해하기 시작해, 어머니는 “집에 가고 싶다” 라며 몇번 울곤 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울지 마라! 지금도 이 문제 때문에 울고 있는 부모들이 많단 말이야!” 라며 어머니를 설득했었습니다. 그것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알았어요, 우리 도모코가 통일교회의 잘못을 알 때까지 죽어도 여기를 떠나지 않겠어요” 라며 새롭게 결의했습니다.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목사가 일방적으로 준 정보를 믿고, 정신적 고통을 느끼면서도 “내 딸을 위해서!” 라고 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열심히 하는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 보임과 동시에 목사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맨션에서의 생활은 지옥 같았습니다. 그 때 저의 몸과 마음은 한계에 달해있었습니다. 친부모를 믿을 수 없고, 친동생을 믿을 수 없고,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내지도 못하고, 늘 긴장된 상황 속에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저는 구역질과 두통, 저림이 나기 시작해 심신 더불어 지쳐버렸습니다. 바깥 공기도 못마시고, 식욕과 체력이 떨어져, 감금 전에는 46kg 있었던 몸무개는 40kg까지 떨어져 급격하게 몸이 말랐습니다. 14년이 지난 지금도 몸무개는 원상태로 돌아가질 않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보고 “(교토성도)교회 사람이 도모코가 무슨 생각으로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고 하시니까 너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라고 했습니다만, 만약에 제가 솔직하게 제 마음을 털어내면 이 감금생활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통일교회를 그만 두는 척해서, “위장탈퇴”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감금생활 69일이 된 날 후나다 목사의 허락을 받고 겨우겨우 맨션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목사는 맨션에 있는 동안 계속 “통일교회는 일방적으로 세뇌하는 단체다”, “문선명이가 사람을 죽이라고 하면 쉽게 사람을 죽여버리는 무서운 테러집단이다”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목사의 수법이야말로 부모님과 친척에게 일방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가르침으로써, 통일교회에 대한 증오를 심어놓고, 본심으로는 하기 싫은 것들도 “그러는 것이 따님한테 최선의 길”이라며 지도하고, 납치감금이라고 하는 범죄행위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을 이용해 불안하게 만드는 수법은 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저의 “신교의 자유”라는 기본적인권에 배려하려는 마음이 일체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이 고통을 받고 있는 사이에, 사실은 우리 남편 또한 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로부터 남편은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한 통의 편지만 받고, 그 뒤로 갑자기 저의 소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남편(당시 약혼중)은 큰 고통을 받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교토성도교회에서의 연금(軟禁)생활〉

맨션을 나오고 나서는 “rehabilitation”이라고 칭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교토성도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의 생활은 연금상태였습니다.

후나다 목사가 말하기로는 “탈퇴하게 되면,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어온 것이 완전히 부정을 당해 절망감에 빠져들기 때문에, 그것이 깊은 마음의 상처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통일원리의 틀린 점을 확실히 이해해 놓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게 되고 사회복귀도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진리, 성서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라며 교토성도교회에서의“rehabilitation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후나다 목사는 “신앙은 자유이기 때문에 강제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는 반면,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이 좋다”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여러가지 모순된 말을 반복하면서 강제개종을 강행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저는 “여기에는 진리가 없고, 제가 정말 원하는 것은 없다”라고 느꼈습니다.

맨션을 나오면서 가족은 완전히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와 제가 맨션을 나오기 3일 전부터 맨션을 나가서 그 지친 몸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토성도교회에서는 저 이외에 “rehabilitation생활”중인 사람들이 5명, 교회를 탈퇴해 교회에서 “보호설득역”이라고 칭하는 헌신자가 3명, 그리고 크리스찬인 여성 봉사자가 1명이 있었습니다. 그외에 후나다 목사의 가족들도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목사의 가족 외는 다 같이 모여서 침식을 같이 했었습니다. 식사는 식재 같은 것을 자기들끼리 사러 가서 다 같이 해먹었습니다.

“rehabilitation생활” 1일 째까지는 어머니와 여동생도 같이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여동생은 “이런 단체생활은 도저히 못하겠다”라며 다음날에 집에 돌아가는 바람에 결국 어머니만 남아서 저와 함께 단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거기서의 생활은 새벽 6시에 조천(早天)이라고 불리는 성서를 공부하는 시간이 있았고, 그 다음부터는 날마다 다릅니다만, 기본적으로 기도회, 성경공부, 전도집회, 찬양집회, 가정집회, 그리고 일요일에는 예배가 있고 오후 1시부터는 통일교회문제의 상담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달 쯤 지나고 나서 통일교회문제 대책집회에도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참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제는 않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참가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제가 화장실에 갈 때도, 씻으러 갈 때도 항상 붙어다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내 딸을 믿고 싶다”라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러한 감시생활을 하는 자체가 고통스러워 보였습니다.

잠을 잘 때는 현관 앞에 전신자(前信者)들이 자고, 저한테는 “혹시 도망가지 않나”하는 경계심으로인지 현관에서 제일 먼 곳에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어머니가 몰래 우는 것을 봤습니다. 제가 “왜 그래요?”라고 물었더니, 본인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데 교회사람들이 와서 “좀 더 따님을 위하는 생각과 행동을 해주시오”라고 한 것 때문에 마음이 힘들다고 했었습니다.

“rehabilitation생활”이 시작한 지 1주일이 지난 날, 교회사람들이 저한테 와서 “탈퇴신고서를 쓰시오”라고 했습니다. 신고서를 쓸 때는, 전에 후나다 목사의 지도하에 탈퇴한 사람들의 탈퇴 신고서를 보이면서 “이렇게 쓰시오”라고 하는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 때는 목사들의 신뢰를 얻는 것 밖에 밖으로 나갈 길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탈퇴신고서”를 쓴 후에, 한 번 우리 어머니와 함께였으나 파마하러 나가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제 발로 처음으로 바깥에 나가서 거리를 걸을 때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오듯이 인내를 하면 꼭 길이 열린다”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 희망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훗날에 안 사실입니다만 우리 남편이 친구와 함께 한 번 교토성도교회까지 찾아왔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 사람들이 “지금 도모코 씨는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고 합니다. 우리 남편은 도쿄에서 일부러 저를 찾아온 거였는데, 저를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교회사람들은 그가 저를 찾아왔다는 사실 조차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rehabilitation생활”이 시작한 지 20일이 지났을 때, 어머니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성도교회사람들이 보고 “도모코 씨 상황도 많이 개선되었기 때문에 어머님은 이제 가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해서 어머니는 집에 돌아갔습니다.

어머니가 같이 있을 때는 목욕은 후나다 목사 집에서 하고 빨래는 어머니가 세탁소에 가서 했었습니다만 어머니가 가시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혼자서 외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누구하고 같이 간다면 사우나나 세탁소에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뇌... 그리고 탈출〉

그런 속에서 저는 부모와 동생이 희생해서 저를 생각해서 지금까지 행동해줬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 속에서, 다시 통일교회에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하고, 그러지 말아야한다는 마음이 서로 싸워, 미치도록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때는 이미 냉정하게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힘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구원을 느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남편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을까”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혼돈된 상황이 계속되었고, “도대체 내 인생은 누구 것인가!” 라고 외치고 싶은 심경이었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본심은 “내 마음에 정직하게 살고 싶다!”라고 하는 마음이 가득했었습니다.

목사들은 “이제 괜찮을 것 같다”라고 저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저를 감금되고 있는 또 다른 형제한테 데려가기도 하고, 납치를 계획하고 있는 부모한테 가서 목사와 부모끼리 상담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체험담을 말해주시오”라며 말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본심을 어기면서까지 제가 원하지도 않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고통스러워서 “역시 여기를 떠나지 않으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버린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토성도교회의 벽에 적혀있는 성경의 구절을 봤습니다.

아사야서 41장 13절

당신의 하나님, 주인 나는 당신의 오른 손을 잡고 당신에게 말한다

“무서워하지 말라, 나는 너를 돌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다! 라고 확신해 눈물이 ?아졌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어기지 않고 솔직하게 살고 싶다”

“종교 간의 싸움의 희생되기는 싫다”

이렇게 생각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믿고 탈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rehabilitation생활”이 시작된 지38일 째, 납치를 당한 지 107일 째, 저는 마침내 속박된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도망나온 것입니다.

〈남겨진 마음의 상처〉

제가 탈출하고 나서는 부모님하고는 편지로만 연락을 주고 받을 뿐이었고 거의 3년 가까이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도망나온 직후는 통일교회의 활동은 쉬고 저를 도와주신 가정의 도움을 받으면서 조금씩 마음을 치유하는 날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저와 남편은 가정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착했던 우리 남편은 제가 납치당하고 나서는 사람이 변해, 사람을 불신하게 되었고, 또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시부모님은, 우리가 축복결혼을 했을 때는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하셨고, 결혼식까지 준비를 해주셨으나, 우리 부모님이 시부모님에게까지 납치를 권유하는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그것도 실현되지 않고, 숨듯이 지내는 결혼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은 우리 부모님을 정말 미워했습니다. 이 납치감금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짓밟혔는지 모릅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남편의 안색이 싹 변해, 갈곳 없는 분노를 저한테 표현했습니다. 밤에는 잠을 못 이루고, 악몽에 시달리게 되어, 마침내 남편은 어쩔 수 없는 증오와 슬픔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버렸습니다. 일을 하지도 못하고, 일을 시작해도 오래 못 가고 그만둬 버렸습니다. 그러는 자기자신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힘들어했습니다.

6년 동안 지옥 같은 세월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06년 여름에 저 또한 우울증에 걸려버렸습니다.

남편은 지금도 납치 이야기를 하면 화가 치밀어서 안색이 싹 변해버립니다. 과거의 안 좋은 일이 생각 나서 풀리지 않는 한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납치감금을 직접 당한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주위의 가족들도 이렇게 마음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 동안 남편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저를 꾸짖는 남편을 저또한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우울증에 걸려, 그의 고통과 납치되었을 때의 고통을 느끼면서 남편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개인적으로 남편을 화나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저한테 “내가 당신한테 화가 날 때는, 내 기억 속에 있는 당신의 보모님한테 받은 모욕이 나의 분노를 더 증가시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듣고, 저는 저하고 우리 부모 간의 문제를 넘어선 심각함을 느껴, 우리 가정의 납치감금 문제는 해결되기까지는 아직 많이 멀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저도 가끔 저의 무력감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삶의 가치를 잃어버린 듯한 마음이 듭니다. 지금은 제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조용히 신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3명의 자녀를 낳고 자녀들 만이라도 순수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생을 살아기를 우리 부부는 원하고 있습니다.

반대파 목사들은 감금을 통해 통일교회 신앙을 완전히 버릴 때까지 개인의 자유를 빼앗아 버립니다. 그들은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을 이용해서 “보호”, “설득”같은 미화된 단어를 쓰지만, 그것은 결국 완전한 납치감금이고, 본인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무시한 “미친 자”로서의 취급입니다. 그리고 납치감금을 당한 사람들은 친부모한테 납치감금을 당함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고 깊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신교의 자유를 빼앗기고,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 금이 가고, 이것들을 회복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기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인격을 파괴하고, 정신과 신체까지 위협하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남편처럼 직접 납치를 안 당해도, 주위의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아, 정신적질환을 일으킵니다.

독선적인 “정의감”을 가지고, 죄악감 없이 계속해서 납치감금을 하는 반대파 목사들의 행동을, 저는 절대 용서 못 합니다.

제 체험은 빙산의 일각이고, 저보다 더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납치감금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진력해 나갈 것입니다.

2009년7월23일

시오타니 도모코


전국납치 감금 강제 개종 피해자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