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역경을 넘어 얻은 부모와 자식의 정 - 오모리 요코

저는 20세에 교회로 인도되어 말씀을 들었고, 24세에 헌신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1988년 10월 30일, 6500쌍 축복결혼식이 있어서 25세에 그 축복식에 참가한 약 1년 반 후인 1990년 5월에 납치-감금되었습니다.

이전, 같이 뜻길을 걷고 있던 저와 같은 현 출신의 자매가 납치-감금되어, 그 자매가 교회를 떠난 후에 어머니의 직장에 찾아 온 모양인데, 「통일교회가 안 좋은 곳이다. 요코 씨를 구출하기 위는데 도와 주고 싶다」고 하며, 반대 목사를 소개한 것 같습니다.

제가 헌신적으로 활동하게 된 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성묘를 한 번 해라. 그러면 너의 신앙도 인정하고,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감금되지 않을까?」하는 불안이 좀 있었습니다만, 이틀째 아침 6시경, 친척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아버지가, 1층에서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을 2층 방에서 들으면서, 불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날, 돌아가기 전에 성묘한 다음, 본가에 인사하러 가게 되어 있었는데, 아버지의 차는 묘가 있는 곳이 아닌 아버지의 누나네 집 쪽으로 향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고모네 집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 친척이 많이 모여 있었고, 아버지가 「지금부터 이야기를 좀 하자. 지금부터 서로 이해할 때까지 철저하게 이야기하자. 그것이 해결 되면 나오너라」하며, 감금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의 눈이 뱀 눈처럼 변하는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배후에 사탄이 있다!」고 확신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감금으로 제가 제일 공포스러웠던 것은 반대 목사나 부모가 아니라 제 자신의 마음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어느 정도 이 길을 믿고 있는가 시험해 가는 것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감금 첫날에, 바로 괴로웠습니다. 자신을 지킬 것이 아무도 없는 가운데서의 싸움, 조건도 없는 가운데 적진에 들어가 싸우는 어려움, 반대 목사를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으면서 싸우는 길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5~7일 정도 지났을 때였을 것입니다. 사가현 가라쯔 성도교회의 나카무라 가츠히코 목사와 구마모토의 키보가오카 교회의 혼다 가츠히로 목사가 왔습니다. 그 두 사람을 본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가지고 있던 책을 두 사람에게 던졌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 것이 아니었느냐? 듣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해서, 「나는 그런 약속하지 않았다. 이 대화는 부모와 자식의 문제니까 부모와 같이 이야기하겠다. 당신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반론했습니다. 그러자 나카무라 목사가 저의 태도를 보고 매우 화를 내며 「당신의 딸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좀 더 부녀의 신뢰관게를 회복한 다음에, 무엇이든 듣겠다고 하면 나를 부르세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교육하러 오겠습니다」하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 후 제가 어릴 때 자라던 곳, 어머니의 친정(사찰)로 옮기는 것이 저의 마음이 열리지 않겠는가 하여 감금장소가 어머니의 친정이 되었습니다. 본당 뒤에 작은 방이 두게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방에서 생활하게끔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뒷방이었으므로 천정이 아주 낮고, 안에는 휴대용 변기, 이불, 책상이 준비되어 있었고, 식사도 세수도, 모두 거기서 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절에서의 감금에는 가고시마의 일본기독교단, 후다 히데하루 목사가 자주 왔습니다.

창은 이중으로 되어 있고, 섀시와 미닫이 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미닫이 문은 모두 큰 못으로 박아 놓았고, 전혀 밖을 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옆에도 방이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경계로 하여 맹장지에도 못이 박혀 있어서 전혀 열리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문에도 이중으로 자물쇠가 잠겨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신앙력이 4,5년이 되었다고 해도, 불과 40일 만에 교회를 떠난 형제자매를 보고, 그렇게 간단하게 하나님을 등질 수 있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입장에 서 보니, 비로소 그러한 형제자매들의 기분을 알았습니다.

저의 경우, 천정이 아주 낮은 곳에서 1개월간 생활해 가게 되는데, 영적인 힘을 잃어 정신이 이상하게 되어 버립니다.

성서도 성가도 말씀도 모두 빼앗아가 버리고, 기도하려고 하면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껏 밀어버리든가,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이상해져 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머리에 떠오른 것이 해외 선교에 가 있는 형제들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등지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가 있는 형제자매는 심정이 떨어져도 목회해 줄 사람이 없고, 말씀도 도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 낸 것이 「신천지」에 게재 되었던 이요한 선생의 말씀으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중대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여자 하갈을 하나님과 상담하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보내어 그때 태어난 아이가 이스마엘이요, 하나님은 「나는 모른다. 사라가 말하는 대로 두 사람을 내 보내라」로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어쨌든 하나님과 기도하여 하나님과 연결해 가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불을 덮고 자는 척하며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40분, 낮에 21분, 밤에 12분, 반드시 이것만은 계속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에서 이렇게 기도한 적이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기도했습니다.

계시와 꿈으로 인도되다

그러자 이상한 일들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시작한 지 21일째 정도였습니다. 꿈을 꾸게 되었고, 여러 가지 계시가 니렸습니다. 그 가운데 3가지 정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죄송한 이야기지만, 만약 제가 영적으로 이상하게 되어,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배반하게 되면, 그때는 살 수 없다,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죽을 준비까지 했습니다. 면도칼을 준비하여, 어머니의 가방에서 강한 두통약을 훔치서 그것을 몰래 갖고 있으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만약 만에 하나 당신을 배반하는 일이 있으면 저는 약을 먹고 손목을 잘르고 죽겠습니다」

그때 첫번째 계시가 내렸습니다. 「왜 죽느냐? 너는 살아서 신앙을 지키거라. 문선생은 메시아이므로 죽을 수 없었다」. 「흥남 감옥에 들어가 계실 때도 스스로 몸을 살려 가신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네가 이 곳에서 나가 신앙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두번째 내린 계시는 「사탄은 너를 교회를 떠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축복가정을 하나라도 깨는 것이 사탄의 목적이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세번째는 「나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 나의 소원은 하나님의 혈통을 이 지상에 한 사람이라도 많이 남기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듣고 나는 「아직 죽을 수 없다. 여기서 무사히 나가, 하나님의 혈통을 낳을 때까지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속해서 이상한 일이 이어졌습니다.

절에 감금되어 있을 때 절의 주지가 「지루하니까」 하면서 렌탈 비디오 2개 빌려다 주었습니다. 인디 존스의 「마지막 성전」과 스티브 맥퀸의 「대탈주」였습니다. 이것을 보거 정말 힘이 났습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탈주 불가능이라고 하는 수용소를 죄수들이 빠져 나가니 이 감금도 절대로 빠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배를 둘러싸고, 선과 악이 싸움입니다만, 마지막으로 선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가 났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은 절대 틀림없다고…….

탈출 한 다음 저는 「왜 절의 주지가 그 두편의 비디오를 빌려다 주었는가」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혹시 「나를 도망가게 하고 싶었다」라고 하는 생각이 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 구마모토에 귀성했을 때 그 진심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지는 「나는 그런 비디오를 빌리지 않았다. 뭔가 실수였겠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것은 이 사람의 의지로 한 것이 아니다. 자기의 의지가 아니니까 그 부분만이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다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또, 꿈에서도 이상한 것이 있어서 「후스마의 일부가 열리니까 옆 방으로 도망가라. 그리고 창을 넘어 도망가는 거야」고 했습니다. 그때가 5월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일어나서 후스마를 열려고 했습니다만, 열린다고 한 것이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40일째가 와서 나는 창을 깨고 그 곳을 빠져 나가려고 결의했습니다. 그40일이라고 하는 것이 6월이 접어든 후였는데, 5월 31일 아침 다시 한번 계시가 내린 것입니다.

「오늘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너가 기도조건을 쌓아 온 것이 6월이 되면 다시 하나에서부터 쌓아 올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버린다. 게다가 6월에는 언제나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달이다. 영적으로 아주 약해지는 달이다. 그러므로 오늘 실행해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 후스마를 보니 왠일인지 못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본 순간 하나님께서 오늘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못이 왜 없어졌느냐 하면 저의 마음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본 부모가 6월이 되면 무라카미 히소카 목사를 불러, 옆 방에서 나를 교육하려고 생각하여 아버지가 못을 빼고 준비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못을 빠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무라카미 목사가 오기 전에 탈출한 것이 됩니다. 게다가 탈출해야 할 때를 영계에서 가르쳐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탈출한 후 부모가 많은 돈을 주고 반대 목사를 써서 나를 감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뜻길을 가는 가운데 그 상처가 사라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책임분담의 길을 걸었습니다만, 제일 큰 것이 전도대상자를 말씀으로 교육하는 책임을 맡고 일할 때였습니다. 「제일 가까운 혈육을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할 수 없다면 먼저 나에게서 먼 사람을 먼저 사랑하자. 내가 담당한 사람을 하늘 앞에 연결해 가겠습니다」고 결의했습니다. 불과 1년간이었습니다만, 거의 모든 전도대상자를 하늘 앞에 연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분의 게스트와 중요한 만남이 있는 날, 주체가 저의 부모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과 겹치게 되었습니다.

주체는 저와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만, 「게스트의 영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저는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제가 넘어야 할 마지막 시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게스트와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주체로부터 연락이 와서 저의 부모가 받아들여주었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반대목사 문제를 담당한 사람으로부터 감금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참부모님의 사진이 나왔을 때에는 그것을 밟아도 괜찮으니까 어떻게든 감금으로부터 탈출하라고 하는 지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감금되기 전이었습니다만, 감금으로부터 탈출한 형제자매 가운데는 그 「사진밟기」를 한 것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감금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본심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참부모님을 형식적으로라도 부정한 것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만약 그러한 상황이 되었을 경우, 아버님의 사진을 밟지 않고 나올 것이다고 마음속으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신앙을 굽히지 않고 감금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있어서 행운이었습니다. 만약 밟았다고 하면 아마 너의 양심이 용서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결사적의 탈출

그런데 점심시간인 12시부터 30분간만은 방을 감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절 주변은 농가인데, 12시부터 30분까지는 사람들이 없어집니다. 감시가 식사하러 간 사이에 저는 옷을 갈아 입고 옆 방에 가서 준비했습니다. 창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미닫이를 찢고 문살을 부수고 떼어 내어 섀시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지금 제가 여기서 뛰어내려 나가겠습니다. 만약 탈출이 실패하면 다시는 도망가기 어렵게 됩니다. 그때는 죄송하지만, 역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고 창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그 아래는 작은 개울이 흘러, 옷이 흠뻑 젖어가며 달렸습니다.

제 어머니의 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이 외부로 새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절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새어 나가면 소문이 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절 주위에는 그 절에 다니는 신자가 많이 있었으므로 나는 「뛰기만 해서는 안 된다, 가까운 집으로 들어가자」하고 생각하여, 맨발로 가까이 있는 집으로 뛰어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아벨과 연락이 안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전화를 빌려서 교회로 전화했습니다. 전화로 「지금 나왔습니다」하자, 「요코 씨, 6000년만의 만남이구나」하였습니다. 그때 정말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v 그리고 「거기 부인이 좋은 분이라면, 차로 가까운 병원까지 도망쳐요. 그리고 택시를 불러 시내까지 가요」라고 지시해 주었습니다.

그 부인은 너무나도 좋은 분으로 맨발인 제게 신과 먹을 것을 주고, 병원까지 태워 주었습니다. 거기서 택시를 불러 시내까지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역경을 넘어 얻은 부모와 자식의 정

그런 일이 1990년에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아버지나 어머니도 제가 의사를 ?히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하여 1992년 9월에 납폐하고, 11월에 피로연, 그리고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지금도 매스컴의 공격이 격렬하지만, 「친척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와 나는 부모 자식간이다. 부모는 자식을 믿는 법이다」고 하며, 무사히 입적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감금에는 하치요교회 나카지마 목사, 가고시마교회의 후다 목사 등 네 사람의 목사가 와서 하루 여덟 시간 정도 설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해도 제가 변하지 않자 6월에는 무라카미 히소카 목사가 올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바로 그 전에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1개월 사이에 여러가지 계시를 받아 나왔을 때에 그 달의 「패밀리」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제가 1개월간 계시 받은 내용이 전부 씌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참부모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신앙을 끝까지 지켜 나가겠습니다.


전국납치 감금 강제 개종 피해자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