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 번의 납치 체험, 감금 행위에 가담한 경찰관

코바야시 소우이치로우

도와 달라는 내 머리를 때린 형사부장

1992년 11월 30일, 교회에서 자택으로 돌아오는 한 밤중의 일이었습니다. 잠자리에 든 직후 양친과 친족들이 「이야기 좀 하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저의 양 겨드랑이를 잡고 강제로 차에 싣고, 눈을 가린 채 우에노의 위클리 맨션 10층까지 연행하여, 감금해 버렸습니다.

저는 폭력적으로 데리고 가 가둔다는 부당한 방식에 항의하며 떠들었습니다. 발로 힘껏 창을 차자 유이창이 깨어졌고, 큰 소리로 「납치-감금되었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며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통보해 주었는지, 여러 대의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에 총을 휴대한 수명의 기동대원이 들어왔습니다.

아버지가 현관에서 기동대원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본 나는 이제 해방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형사부장이 오더니 나에게 「통일교회 문제는 부모와 자식의 문제다. 시끄럽게 하지 마! 너가 나빠」 하여, 나는 형사부장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구하며 강제로 신앙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 감금되어 있다는 사정을 설명했습니다만, 반대로 머리를 얻어 맞고 끌려 올라갔습니다.

나는 정말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다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양친은 나를 모포로 뒤집어 씌우려 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필사적이 되어 저를 달래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뿌리치고 부당한 납치-감금에 계속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맨션 관리인이 와서 「영업에 방해가 되니 나가 달라」고 해서 부모님과 친척들은 감금을 단념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자택에서의 납치-감금이었습니다.

방심시켜 두번째 납치-감금

두번째는 1955년 3월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저의 대학졸업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친척도 온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부모님이나 친척을 전도할 수 있는 기회다」고 생각이 들어 기뻤습니다. 당일 친척은 교회VTR 「진심」을 보고 박수까지 했습니다. 그후 볼링과 식사를 함께 하고, 나는 축하까지 받아 매우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를 방심시키기 위한 함정이었습니다. 나는 속는다는 것을 전혀 눈치째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탔습니다. 그런데 차는 집이 아닌 다른 방향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감금에 눈치 챈 나는 차 안에서 날뛰었습니다. 이윽고 차는 군마현 오타시의 어느 맨션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시각은 벌써 밤 12시를 지났습니다만, 나는 도움을 요청하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첫번째 감금 때, 내가 날뛰어서 감금을 포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맨션 주차장에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가족과 친척들은 저를 도네가와의 하천 부지로 옮겨, 거기서 설득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벽녘까지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나는 친척을 머리로 받아, 모두가 진지해지고 한층 더 논쟁이 격렬해졌습니다.

잠시 후 「대화의 장」이 주어졌는데, 그 일순의 기회를 보고, 나는 단숨에 제방을 건너 도망쳤습니다. 붙잡히면 빠져나가고, 또 따라잡혔다가 도망치면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한계를 넘어 밭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가슴을 억누르며 저는 따라오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어떻게든 민가에 숨을 수 있었습니다.

한참동안 양친과 친척들이 뛰어다니는 발소리, 저를 부르는 소리, 차 엔진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치 들개사냥이라도 하는 것 같은 가운데 저는 떨면서 숨어 있었습니다. 들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에 떨며 거적을 뒤집어 쓴 채 3시간 정도 숨어 있었는데, 좀처럼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 아이에게 발견되어 「엄마, 여기 이상한 사람이 있어요」하여 나왔습니다. 나는 교회로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그 집 주인에게 전화를 빌려달라고 했는데, 빌려 주지 않아, 결국 공중전화를 찾아 양말에 감추어 두었던 돈으로 연락하여, 교회에서 사람이 와서 무사히 두번째 납치에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강제로 신앙을 포기시킬 목적으로 두 번이나 납치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를 되돌아보면, 그래도 부모를 믿고 싶은 제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손발을 건축용 자재로 묶다

세번째 피해를 당한 것은 1997년 4월 11일의 일이었습니다. 아침 7시, 여느 때처럼 일하러 가기 위해 교회 시설에서 나와 도로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슈이치로다!」고 하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 손발이 잡혀 들려 올라가, 가까이 정차해 있던 웨건 차에 실려졌습니다. 태워진 차 창에는 스모그 필름을 붙여져 있었고, 열리지 않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같이 「또 감금시킬 것이다」하며 강제로 신앙을 포기하게 하는 위험성을 교회 책임자로부터 듣고 있었으므로, 준비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차 안에 묶여 있어도 희망을 잃지 않고 외쳐댔습니다.

「납치-감금입니다. 도와주세요!」라고 몇 번이나 외치는 가운데, 차는 달려 나갔습니다. 납치된 장소가 센쥬 경찰서 바로 옆이어서 통보해 준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잠시 후 경찰차가 뒤쫓아 와서 차를 돌려 세워 경찰서 내의 주차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이제 해방되겠구나」고하 기대했습니다. 경찰관이 웨건 차의 도어를 열었을 때 나는 「인권침해입니다. 남치-감금입니다. 도와 주세요!」 고 했는데, 어머니를 비롯해 웨건 차와 함께 달려온 다른 차에서 내린 장년 부인 약 20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경찰관을 향해 「통일교회는 나쁜 집단이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의 문제다」는 등을 외치며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경찰관은 그냥 「아, 부자간의 문제라면 가세요」라고 웨건 차의 도어를 닫았습니다. 나의 외침은 간단히 무시되어, 감금 장소로 강제적으로 구속되어 가는 것에 대해 얼마나 분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이 나라에는 "신앙의 자유"라는 인권이 없다. 국가 권력에 의해서 인권이 무시되었다. 반드시 이것을 넘어 이 나라를 바꾸어야 한다!」라고 결의하면서 눈물을 삼켜며 시키는 대로 감금장소로 갔습니다.

데리고 간 곳은 두번째 간 곳과 같은 군마현 오타시의 맨션 주차장이었습니다. 도착하자, 이번에는 소리칠 수 없도록 약 20명의 부형들에 의해 보기 좋게 메여 올라가 맨션의 2층 어느 방에 넣어졌습니다. 감금을 돕기 위해 온 약 20명의 부형들은 내가 감금되는 장면을 능글능글 웃으며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의지에 반하여 억지로 감금되었을 때의 분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문 선생님께서 아무 잘못없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짓하고 있어?」하고 문선생님께 전 신자가 말하는 장면을 상기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나의 저항도 보람없이 맨션 2층에 들려올라 갔습니다. 도어의 체인에는 작은 좌물쇠와 다이얼 식 자물통이 장착되어 간단히는 열 수 없게끔 장치되어 있었습니다. 또 두 개 있는 창의 안 쪽에는 베니어판으로 막혀 있고, 또 한편의 창에는 두꺼운 특수 셀룰로이드 판이 끼워져 있고, 모두다 열리지 않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탈출할 가능성이 없는 환경을 보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느끼고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화장실 문은 열쇠가 채워져 있게끔 장치가 되어 있으며, 칼 종류는 될 수 있는 한 놔 두지 않고 과도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더욱 분노가 끓어 올랐으며, 그 스트레스는 폭언을 쏟아내게 되었고, 나중에는 주먹다짐이 되었으며, 나는 짖눌려 손과 양발을 건축용 자재로 묶였습니다. 그 재료는 몸부림 칠수록 더욱 조여오게 되었습니다. 손은 뒤로 묶였기 때문에, 움직일수록 조여와 어깨가 빠져 버렸습니다. 나는 어깨가 빠진 아픔을 호소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용 자재를 제거해 주지 않고, 밥을 먹을 때도 개처럼 먹었으며, 목욕도 손발이 묶인 채 아버지가 씻어 주었습니다.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이 정말 분하여 울었습니다. 그것은 감금되어 3일간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이 누이동생에게 맞기도 한 정말 분한 기간이었습니다.

시미즈 목사 「묶어도 좋다」

감금된 다음날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시미즈 요시오 목사가 감금장소에 왔습니다. 나는 부당한 환경 속에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목사의 이야기에 대해 무엇을 묻더라도 아무런 감상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부모가 「통일원리를 강의해 봐라」하고 부탁했기 때문에 아이비서점에서 말씀을 사 달라고 부탁하였고, 원리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부모를 전도하려고 진지하게 결의하여, 강의안을 만들어 70일간 총서에서 재림론까지 강의했습니다.

도중에 모세 노정을 마쳤을 때, 아버지는 문선생님을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감상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미즈 목사의 다양한 통일교회 비판으로 양친의 전도는 어렵게 되어 갔습니다. 저는 정말 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기간에 꿈에 문선생님 내외분이 몇 번이나 나타나 저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마음 속에 울려퍼졌습니다.

「너를 사랑한다.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

그것은 정확히 40일째의 일이었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싸여 힘이 ?아났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매일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감금된 지 약 3개월이 지난 7월의 일이었습니다. 장기 감금으로 인해 극도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겹쳐 분노가 폭발, 창을 힘있는대로 걷어찼습니다. 그러자 두꺼운 셀룰로이드 판이 튀고, 유리창에 금이 갔습니다. 그것을 본 부모님은 격하게 분노하여 시미즈 목사를 불렀습니다.

맨션에 온 시미즈 목사는 신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와 앉아 부모님에 대해 「난폭하게 굴면 묶어도 돼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폭력을 부추기는 시미즈 목사를 보고 이 사람이 정말 목사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8월, 저는 운동부족과 인스턴트 식품을 너무 많이 섭취해, 요도결석으로 요도를 다쳐 혈뇨가 나왔습니다. 저는 제 몸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울면서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울면서 「목사가 허락하지 않으면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몸을 걱정하는 어머니였습니다만 완전히 목사의 지시대로 하는 모습을 보고, 슬픔과 동시에, 그렇게 지도하는 목사에 대하여 분노가 ?구쳤습니다.

혈뇨가 나오고, 아픔을 참으면서 지낸 2주일 후, 시미즈 목사가 아파트에 와서 「친척의 인원수가 모였습니까? 감시할 수 있는 병원이 좋다」 등을 말하며 어머니의 기분이나 저의 건강상태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제가 도망가는 것만 걱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날도 병원에 가게 해 주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친척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목사가 진찰실에 들어와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는 가운데 진찰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감금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위장탈퇴"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조용히 진찰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제가 신앙을 잃었다고 생각했을까요? 도망가지 못하게 감시는 했습니다만, 시미즈 목사가 일주일에 한 번 오타 하치만 교회의 「스터디그룹」에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9월 18일, 오타 하치만 교회에서의 스터디그룹에 가서 기회를 엿보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5개월간이라는 오랜 기간 감금되었기 때문에 빨리 뛸 수가 없어서, 아버지에게 붙잡혔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목사를 불러」라고 하여, 통행인에게 호소하여 군마의 오타 경찰서의 경찰차가 왔습니다.

인권침해를 간과하는 경찰

경찰관에게 내가 납치-감금되어 있다는 사정을 말하자, 시미즈 목사가 웨건 차로 왔습니다. 경찰관은 시미즈 목사와도 이야기했습니다. 센쥬 경찰서에서 경찰관이 저의 소호를 완전히 무시하고, 부형들의 주장만 들었습니다. 저는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감금되어 있고, 자기의 인권이 무시되었고, 침해 받고 있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호소했습니다.

얼마간, 경찰관은 목사와 서로 이야기했습니다만, 목사에게 설득된 것 같았고, 「부모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결국, 저는 경찰관이 보호하는 가운데 감금되었던 맨션으로 다시 끌려갔습니다.

위장탈회의 틈을 보고 도망갔는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 다시 붙잡혀 버렸으므로, 저는 다음 위장탈퇴가 더욱 곤란해졌다고 생각, 아예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맨션의 방에 들어갔을 때 저는 경찰관에게 질문했습니다. 「저 창문을 보십시오. 베니아판으로 끼여 있고 열리지 않게 되어 있으니, 이건 감금이지요?」 그렇게 소호하자 경찰관은 「아니, 이건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다히 한 번 창에 끼워진 두꺼운 셀룰로이드 판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만, 역시 답변은 같았습니다. 나는 실망함과 동시에 다음 위장탈회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생각하며,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다음 탈회의 찬스를 기다리려고 생각했습니다.

11월 10일의 일이었습니다. 시미즈 목사는 제가 감상을 일절 말하지 않고 있을 때, 통일교회 비판의 재료가 더 이상 없어졌는지, 「이제 어때? (통일교회를)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만 두려고 생각합니다」고 했습니다.

제가 탈회를 결의했다고 하는 것으로, 이어서 요코하마의 토츠카 교회의 쿠로토리 사카에 부목사에게 넘겨지게 되었고, 탈회자와의 면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1월 14일 밤, 저는 전 신자와 면접 시간을 갖고, 부모와 시미즈 목사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 신자는 저의 세 번에 걸친 납치-감금에 대해 「납치-감금은 범죄다!」고 하여, 그 강제적인 방법에 오히려 동정했습니다. 저는 내심 「납치-감금은 범죄야」고 외치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전 신자는 제가 위장탈회인지 어떤지 떠보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라고 보고, 「아니다. 부모가 사랑하니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고 하여, 마음에도 없는 말로 전 신자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1월 15일 오전 0시를 지나, 밖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가 탈회를 고백한 후 현관 도어의 체인은 평상시와는 달리 잠기지 않게 되었고, 풀려 있었습니다. 부모님도 안심한 것 같았고, 인스턴트 라면을 먹고 있었습니다.

나는 도망갈 찬스가 온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현관에 있던 스포츠 슈즈를 신고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고통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뒤쫓아 올 경우, 빠져 나갈 수 있는지 불안했습니다. 그러자 자동차가 다닐 리 없는 한적한 심야 도로에 차가 달려 왔는데, 가까이 있는 교차로의 신호가 정지신호가 되었고, 눈앞에서 정차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차라고 확신하였으며, 차 문을 열고 뛰어올라 탔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올라탔는데도 불구하고, 운전하던 사람이 「무슨 일이야? 친구가 사고를 냈어? 동경까지 태워줄까?」하고 일방적으로 말했습니다. 그가 왜 "도쿄"라고 했는지는 모릅니다만, 나는 「네, 하지만 타테바야시까지도 좋습니다. 거기서부터 택시로 가겠습니다」고 해서 다테바야시까지 태워 주어 무사히 감금에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번째의 7개월간이 넘는 감금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소중한 부모가 목사가 하라는 대로 하며,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 모습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부모는 목사로부터 통일교회 비판을 일방적으로 듣고 그 이야기의 내용이 너무나도 참혹하여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목사가 이용하여 부모를 협박, 곤혹시켜 감금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는 지금도 나를 마인드 컨트롤 된 인간으로밖에 보지 않고, 순수한 눈으로 아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부모와 화해할 수 있도록 노력함과 동시에 시미즈 목사를 방문해 부모에게 무슨 말을 했기 때문에 부모가 이런 일까지 하게 되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감금 중에 맨션 안에서 들은「너를 사랑한다.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고 하는 하나님의 소원은 이 납치-감금을 없애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가게끔, 지금부터 활동해 가려고 합니다.


전국납치 감금 강제 개종 피해자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