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권을 무시한 납치-감금 허용할 수 없다

시즈오카 재주 M·S

1991년 입교 5년째, 당시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서 활동하고 있었을 때, 다른 현에 살고 있던 부모가 말하는 내용 중에 반대 목사와 연결되 있는 것 같은 언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1991년 3월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로 후쿠야마로 오게 되었습니다. 교회 책임자로부터 조심하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만, 납치-감금에 관한 정보를 자세히 몰랐던 저는 「감금되면 뛰어 내려서라도 도망쳐 오겠습니다」라고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했습니다.

아버지가 운전하고 후부좌석에 어머니와 제가 앉았습니다. 가는 도중에 어머니가 「사실은 오늘 선을 봤으면 한다」며 하는 말을 건네왔습니다. 저는 통일교회에서 결혼하기를 원하고 있었으므로 「선 봐서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어머니는 그것은 알고 있었는데, 친척의 권유로 거절할 수 없기 때문에 동석만이라도 해달라 하기에 할 수 없이 승낙했습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은 입구가 오토 록(auto rock)의 원룸 (one room) 맨션이었습니다. 방 안에 들어가니 어쩐 일인지 사촌누나가 두 사람 있었고, 천 커버가 걸린 의상 케이스가 구석에 있었고, 방 한복판에 테이블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자마자 저는 “속았다!”하고 바로 되돌아가려고 했습니다만, 이미 늦었습니다. 도어 노브에는 쇠사슬이 둘둘 감기고, 맹꽁이 자물쇠가 걸리고, 베란다측의 창문 열쇠도 쇠사슬로 빙글빙글 감겨져 있었으며, 그것을 숨기기 위해 리본이 꾸며져 있었습니다. 유감스러움과 화가 남과 쇼크가 뒤섞여 뭐어라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경에 빠졌습니다.

곧 바로 「여기서 내보내 줘! 이러 곳에 있을 때가 아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의 태도에 동요하지도 않았고, 「이제부터 여기서 함께 공부하자」고 묘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제게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나치게 냉정한 그런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기분 나빴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입니다만, 감금하는 노하우(저쪽에서는 감금이 아니고 보호)나 감금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한다, 그때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 하는 것을 감금 전에 반대목사나 납치-감금으로 탈회한 전 교회원에게서 철저하게 교육받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딸이 어떤 행동을 해도 절대로 화내서는 안 되고, 냉정한 태도로 행동하고, 함께 공부해 간다는 자세를 취하도록 지도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것도 나중에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들은 것입니다만, 저를 감금하기 위해 제가 탄 차에서 만일 제가 도망쳤을 경우 곧 붙잡을 수 있도록 친척 남자들 수명이 탄 차가 따라왔다고 합니다. 맨션은 뛰어 내려서 도망칠 수 없도록 3층 이상에 있는 방으로 결정되어 있는데, 제가 있었던 방은 4층인가, 5층이었습니다.

그 날부터 저의 감금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일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때문에 장기휴가를 얻어서 임하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처음 3일간은 목사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목사에게 저의 상황을 은밀히 보고하면서 제가 듣는 자세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좁은 원룸에 24시간 아버지 어머니에게 감시받으면서 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정신적으로 이상해질 것만 같았습니다. 한밤중에 문득 눈이 뜨여도 아버지 아니면 어머니가 ?어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현관의 맹꽁이 자물쇠의 열쇠는 줄에 달아서 언제나 아버지가 목에 걸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우리들도 공부하고 싶으니까 여기서 함께 공부하자」고 앵무새와 같이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했습니다.

저는 첫날부터 금식을 시작했습니다만, 체력에 자신이 없었으므로 만일의 사태에 도망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어쨌든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로 반드시 여기서 나가겠다고 결의했습니다. 4일째에 들어가자 드디어 목사가 왔습니다. 당시, 오카야마시 니와세에 있는 기독교회의 타카야마 마사하루 목사였습니다. 나이는 40대 정도로 보였습니다. 감정적인 타이프가 아니고 더듬거리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서와 원리강론을 비교하면서 원리의 잘못을 지적, 사진이나 자료를 보여주면서 문선생님이나 문선생님의 가정 비판, 교회의 스캔들 등을 매일매일 들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텔레비전이나 잡지도 없고 아무런 정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만, “함께 공부한다”기보다 “어떻게 내가 통일교회가 잘못이라고 이해할까”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 같은 태도였습니다. 베란다 측의 유리 창문을 깨뜨려서 도망치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늘 옆에 있었고, 뭔가 일어나면 로바 대응한다는 자세였으므로 도망칠 기회를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며칠이 경과했을 때, 꾀병으로 병원에 갈 때 도망칠 계획을 세웠습니다. 목사는 「꾀병으로 도망치는 교회원도 있다」고 외출을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승낙해서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개인병원이 아니고 도망치기 쉬운 대병원을 지시해 거기에 양친과 여동생 3명과 함께 갔습니다.

병원의 대합실에서 3명의 감시가 없어지고 아버지와 단 두 사람이 되었을 때, 저는 “지금이다! ”하고 달리기 시작해서 입구의 택시 타는 곳에 가서 택시에 탔습니다만,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쫓아왔기 때문에 택시의 운전수는 출발해 주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운전수에게 “나는 감금되어 있습니다. 나의 이름은 OOO입니다. 연락처는 00O입니다”라고 하면서 교회전화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건네 주었습니다.

치료 중도 의사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나는 감금되어 있습니다. 살려주세요!」라고 계속 외쳤습니다만, 그곳이 병원이라 주위에서 정신 이상자와 같이 보여져,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치료 후, 병원 사무국의 사람이 「보통 일이 아닌 것같아서 경찰을 불렀습니다. 이쪽 방에서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라고 지하에 있는 방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신사복 차림의 형사가 두 사람 있었고 아버지 어머니와 선 채로 작은 모소리로 이야기한 후 저와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진짜 형사인지 확인하기 위해 경찰수첩을 확인했습니다. 「나는 감금되어 있습니다」하고 형사에게 호소했습니다만, 「부모가 같이 있는데 뭐가 감금이야! 당신이 집을 떠난 수년동안에 해당하는 것을 이제부터 다음은 집에 있어라!」고 하며 오히려 형사가 소리쳤습니다. 경찰은 모든 사정을 알고 나서도 이런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알고 난 저는 기가 막혔습니다. 결국, 다시 감금 장소로 되돌아가게 되어 정말 쇼크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아버지 어머니의 대응은 반대 목사의 교육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냉정-침착하였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같이 다음 날부터도 감금생활이 계속했습니다. 「입 다물고 공부해라」라고 결코 감정적으로 소리 치르거나 손을 대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약 한달 동안 목사와 양친과 나와의 학습회가 계속되었습니다.

다른 누구와도 접할 수 없는 폐쇄된 공간에서 매일매일 교회의 비판을 듣고, 저는 정신적으로 혼돈하기 시작하고, 교회로 돌아와도 신앙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렸습니다. 어느 날 「나는 통일교회를 탈회하겠습니다」라고 목사와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의사표시 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한 것인가? 이야기 내용의 어디서 그렇게 생각한 것인가」라고 질문을 받았습니다만 상세한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타카야마 목사는 「위장탈회하는 사람도 있다」고 반신반의였기 때문에 「무라카미 선생을 만나게 한다」하여 교토에서 무라카미 히소카 목사가 왔습니다. 무라카미 목사는 제가 정말 통일교회가 잘못인 것을 이해하고 탈회하려고 하고 있는지를 끝까지 확인하기 위해 두 번 방문해 왔습니다. “이제 괜찮을 것이다”라고 감금 장소에서 해방한다는 허가가 나서 저는 후쿠야마 교회로 탈회 의지를 쓴 편지를 우송하고, 짐을 후쿠야마 교회에 가지러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만, 「통일교회는 정말 무서운 곳이라 일단 그만두면 무엇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안 가는 것이 좋고 누구와도 만나면 안 된다」라고 설득 받았습니다. 후일 도쿄에서 와가 신야 목사도 만나러 왔습니다.

제가 감금된 당시부터 납치-감금에 의해 이미 탈회한 형제자매들이 감금 장소로 방문해 왔습니다. 그것은 저의 탈회 의지가 진짜이며 통일교회에 대한 미련이 없는지를 살필 목적도 있어서 매일같이 오는 것입니다. 정말로 통일교회에 미련이 없는가 어떤가 하는 마음의 움직임은 목사가 아니라 탈회한 멤버가 제일 잘 알기 때문입니다. 통일교회는 음주를 하지 않습니다만, “탈회했기 때문에 이미 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친밀감의 표시로 저의 탈회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서일지 모르지만, 캔 술을 가지고 온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후, 성경을 다시 배워 보려는 마음도 있어서 그 원룸맨션에 잠시 동안만 혼자 머물게 해달라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타카야마 목사의 교회를 다니면서 성서를 공부하고, 주일예배에도 수차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에서 배운 이상으로 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없었습니다. 주일예배에는 「이제부터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모른다」며, 사는 지침을 잃고 임시로 몸을 두기 위해 와 있는 탈회자들도 몇 사람 있었습니다.

타카야마 목사의 교회 간판에는 「통일교회, 여호와의 증인 등 이단문제의 상담을 접수하고 있습니다」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예배 후는 별실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통일교회를 탈회한 멤버들과 그 이외에 형제들이 통일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상담하러 온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그때,「통일교회와 관계를 끊은 환경에서 계속 설득하는 방법 이외에는 자녀를 통일교회에서 찾아올 길은 없어요」라고 말하자, 부모의 한 사람이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심각하게 묻자 「그건 나의 입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타카야마 목사는 구체적인 감금의 이야기에는 결코 언급하지 않고, 전 멤버들에게 유도시켰습니다. 거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되고 「통일교회는 반사회적 단체이므로 절대로 자녀를 활동에 가담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서서히 감금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녀를 되찾을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어떤 때, 타카야마 목사는 「통일교회에서 지금까지 헌금한 돈이나 물품을 구입한 적이 있으면 변호사를 소개해 줄 테니까 통일교회에 경제적 데미지를 주어서 빨리 박멸시키기 위해서라도 전액을 상환하게 하면 좋다」고 했습니다.

저는 약 한달 동안, 정신적으로 정리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르는 가운데 통일교회로 되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에도 탈회한 자매의 수기나 와가 신야 목사의 교회비판의 책 등을 많이 가져 와, 모두 읽어봤습니다만, 제 속에 있는 통일교회에 대한 신앙의 핵심적인 부분은 무엇을 가지고도 뒤집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 놓고 통일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기도실에는 저의 얼굴이 그려진 색지가 세워져 있어서 형제자매들이 저를 위해 매일 얼마나 기도해 주었는지를 실감했습니다.

그래도 그때부터 일년간은 다시 잡히지 아닐까 하는 공포심에 고민하며, 정신적으로 지옥과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거리를 다닐 때에도 전방에 정차한 차가 있으면, 그 차에서 사람이 내려와서 데려가려는 것이 아닐까, 또 어디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와서 강제로 차에 밀어 넣지나 않을까 하는 등, 언제나 공포심이 있고 밖에 나갈 때는 항상 썬글래스를 쓰고 다녔습니다. 너무나도 참기 어려운 환경에 다시 가야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감금에 의해 받은 마음의 상처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애정이 동기가 되어 비판적인 정보만 들게 되고 감금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는 원망하는 마음도 없고, 지금은 결혼해서 두 명의 자녀를 얻어, 보통 가족처럼 대해 주는 아버지 어머니에게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인권을 무시한 납치-감금이라는 행동 자체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국납치 감금 강제 개종 피해자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