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파의 정보에 농락 당한 부모 - 통일교회의 진실을 알고, 부녀 화해.


서론

동북지방에 거주하는 니시 아키코 씨(49, 가명)는 과거 세 번에 걸쳐 부모와 기독교 목사 등으로부터 통일교회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한 경험이 있다. 1983년 자택에 연금되었고, 93년과 95년에는 맨션에 각각 2개월 가까이 감금되었다.

한편, 딸의 납치-감금을 단행한 아버지 타카하시 토시오 씨(81, 가명)는 현재, 당시를 돌이켜 보며, 「반대파에게 속았다」고 하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매스컴의 반통일교회 보도에 촉발되어 불안을 느껴 「딸을 구하고 싶다」고 하는 일심으로 반대 목사에게 2년간 계속 다녔다. 목사의 지도 아래 납치-감금을 실행한 끝에, 「한 재산 없애 버렸다」고 깊게 후회하고 있다.


첫 번째 연금

아키코 씨는 부모와 오빠 가족이 있었다. 대기업 해운회사에 근무하고있던 아버지는 상선을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1년 중 10개월 간은 집에 없었다. 나이 차이가 있는 오빠는 일찍 독립하였기 때문에, 아키코 씨는 어머니와 딸, 두 사람만의 생활이 길었다.

아키코 씨가 자택에 연금된 것은 1983년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3세 때였다. 어머니 타카하시 요시코 씨(고인, 가명)는 좌익 사상을 가진 지인으로부터 교회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듣고, 그 지인으로부터 「딸을 감금하여 설득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어드바이스를 받았던 것이다. 아키코 씨는 자택 2층 일실에 갖혀 열쇠가 잠겨졌다. 방에는 휴대용 화장실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키코 씨가 「통일원리」를 배운 것은 고교시절. 당초부터 아키코 씨의 신앙을 둘러싸고 모녀간에 언쟁이 있었지만, 79년경부터 반대가 격렬해졌다.

정이 많고 “담력이 있는 어머니”라는 느낌의 요시코 씨는 「남편이 없는 동안 딸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초조한 마음에 연금이라고 하는 수단을 선택한 것같다. 어쨌든 「딸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만 하면 괜찮다」라고 하는 일심으로 단행했기 때문에, 남편 토시오 씨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연금되었을 때 어머니가 나를 설득했습니다. 한밤중에 부엌칼을 들고 쫓아와 파출소에 간 적도 있습니다. 당시 저는 교회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일을 계속한다』고 했기 때문에 해방되었다고 생각합니다」(아키코 씨)


10년 후의 납치-감금

83년 연금으로부터 10년 후의 1993년 2월 중순, 마침내 아키코 씨는 반대파가 관여하는 가운데 납치-감금되었다.

아키코 씨는 전년인 92년 8월, 한국 서울에서 개최된 3만쌍의 국제합동결혼식에 참가했다. 「축복을 받고 어머니에게 보고하러 가자 어머니는 『그랬어』 하며 원피스를 사 주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딸의 신앙을 용인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합동결혼식으로부터 반년 지났을 무렵, 해운회사를 정년퇴직한 토시오 씨와 요시코 씨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통일교회 비판 정보가 전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를 그만두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한 것이다.

「당시, 귀에 들려오는 정보는 나쁘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텔레비전도 신문도, (통일교회는) 사람을 속이고 돈을 받아 간다고 하는 이야기뿐이었고, 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하는 토시오 씨.

토시오 씨 부부가 불안을 더해 가던 중, 아키코 씨의 친구 N 씨가 도쿄에 있는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부모 모임(이하 「반대부모회」)를 소개했다. N 씨는 아키코 씨와 함께 피아노 교실에 다니던 동료였다.

「감금 전에 『반대부모회』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부부가 도쿄에 있는 기독교회에 몇 번인가를 다녔습니다. 그 교회는 자녀가 통일교회 신자인 부모들이 가득했다. 『납치-감금을 실행하려면, 친족의 전면적인 협력이 필요』라고 하는 정보는 그때였습니다』고 토시오 씨는 말한다. 도쿄에서의 집회나 스터디 그룹에 참가하면서 납치-감금의 구체적인 노하우를 배워 갔다.

이윽고 토시오 씨 부부는 미야기현에서 통일교회원의 탈퇴 설득을 실시하고 있던 전 신자 타구치 다미야 씨(고인)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아키코 씨의 납치-감금 실행일이 가까워졌다.

아키코 씨는 합동결혼식에 참가 후, 교회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반년 지났을 무렵 요통을 앓았다. 휴일을 이용해 N 씨의 자택 가까운 치료원을 방문했는데, 그 사실을 N 씨가 토시오 씨 부부에게 전했다.

아키코 씨는 93년 2월 중순, 두번째로 치료원을 방문했을 때에, 매복하고 있던 부모님이나 친족들에게 납치되어 센다이 시내의 맨션에 감금되었다.

「부모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딸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어쨌든, 딸이 교회를 그만둘 때까지 한다고 하는 각오였습니다」고 토시오 씨는 말한다.

맨션은 감금 전용의 시설이었던 것 같다.

타구치 씨 등으로부터 「『여기 들어가세요』 라고 소개된 맨션의 방에는 도어나 창이 열리지 않는 듯한 장치가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하는 토시오 씨.

아키코 씨는 「맨션에 넣어진 당초, 『경찰 문제로 발전하지 않게 하기 위해 주위 주민에게는 설득 중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외쳐도 경찰은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라고 증언한다.

감금이 시작되어 맨 처음 1주일 정도는 전 신자가 차례차례 와서, 아키코 씨를 설득했다. 이윽고 전 신자 타구치 다미야 씨의 아내 카즈코 씨(고인)가 설득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 1주일 후 타구치 씨 자신도 아키코 씨를 설득하기 위해 맨션으로 왔고, 통일교회의 교리 비판을 반복했다.

아키코 씨는, 타구치 씨와 이론 대결을 해도 길어질 뿐이라고 생각하여어쨌든 빨리 해방되기 위해 「위장탈퇴」 하기로 결정했다. 남편 타카시 씨(가명)가 자신이 납치된 그 날에 혼인신고를 했다는 것을 감금 중에 알아, 아키코 씨는 「빨리 나가고 싶다」고 하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했다.

「나는 『교회의 활동에 지쳐 있었다.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하는 생각이 있었으므로 그만두겠다』고 말하며, 상대의 이야기에 동조했다. 그러자 내가 정말 탈퇴했는가를 조사하는 심사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매일 전 신자가 와서 나의 표정을 보면서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등의 질문을 합니다. 나는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금 현장에 온 것이 타구치 다미야 씨의 딸이었다.

「그 사람은 영적으로 아주 민감하여 『그만두었는지 그만두지 않았는지를 대개 맞힌다』 라고 했습니다. 그 따님이 마지막에 심사합니다. 따님은 나를 보고 『반반이다』고 하며, 상당히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심문”이 계속 되는 중에 아키코 씨에게 감금으로부터 탈출할 찬스가 찾아왔다. 그것은 감금으로부터 약 2개월이 지난 93년 3월 하순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믿어주었는지 현관 열쇠가 열려 있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맨발로 도망쳤습니다. 맨션에서 나올 때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부모를 남겨 두고 가는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심경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딸이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 토시오 씨는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구급차로 옮겨졌다. 지금까지의 마음고생에 딸의 도주라는 커다란 쇼크가 중복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큰 변을 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키코 씨가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약 2년 반 후의 세 번째 감금장소에서였다.


세 번째의 탈퇴 설득

토시오씨 부부는, 두 번째의 탈퇴 설득 실패 후, 곧 다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처음은 동북지방에서 상경하여 반대부모회에서 공부했는데, 이윽고 니가타 니츠시의 마츠나가 야스토모 목사를 소개받아 매주말, 부부가 같이 동 목사의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을 이용해 자동차로 편도 4시간을 들여 니가타까지 다녔다. 그런 생활이 2년간 계속되었다.

「일요일 오전 중에는 예배 설교, 오후에는 구출을 위한 스터디 그룹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납치의 방식 등을 공부합니다」

스터디 그룹에서는 자기 아이를 납치-감금하여 탈퇴시킨 전 신자의 부모들이 「최저 4명 정도의 친척의 협력이 없으면 어렵다」 등과 자신의 체험담을 섞어 설명했다.

「마츠나가 목사는 아침에 잠시 인사만 하는 정도이고 그 다음은 오지 않습니다. 아마 탈회설득을 위해 여기 저기로 다니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라고 하는 토시오 씨.

「니가타에서는 당시, (탈퇴 설득의) 대기자가 280명이 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감금 예정자의 일람표가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댁은 몇 번입니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의, 그 번호 순서대로 납치-감금이 실행된 것 같다. 통일교회원에 대한 탈퇴 설득이 시스템화 되고 있었다.

납치-감금을 실행하기 직전, 마츠나가 목사로부터 직접적인 지도가 있었다.

「마츠나가 목사가 『이제 차례가 왔으므로 빨리 데려 오세요』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인 납치 지도도 있었습니다. 본인이 직장에서 돌아올 때, 친척을 잘 배치하여 딸이 도망치지 않게 차에 밀어넣는 것 같은 내용입니다. 친척 몇 사람을 모으라고 마츠나가 목사의 지시하는 것입니다」.

아키코 씨가 당시 살고 있던 곳은 남편의 본가인 후쿠시마현. 95년 11월 상순 저녁 6시 반, 아키코 씨는 근무지에서 돌아오는 시간대를 노렸다.

당시 초등학교 사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아키코 씨는 업무가 끝나고 학교 주차장까지 갔을 때 부모와 오빠, 친척들에게 납치되었다. 그대로 니가타현 니즈시 맨션에 데려가 12월 말까지 감금되었던 것이다.

토시오 씨 부부는 사립탐정을 고용하여 아키코 씨가 있는 곳을 조사했다. 조사비용만으로 약 100만엔이 들었다고 한다.

「사립탐정이 있는 곳을 알아내 주었습니다. 딸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느지 조사한 다음 우리가 직접 가서 딸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오는 시간도 조사했습니다」.

그때 마츠나가 목사로부터의 지시는 「맨션에 데리고 가 주세요. 다음은 우리들이 설득할테니까」고 하였다.

니가타의 맨션에 감금이 시작되자 매일 5명 정도의 전 신자가 쉴새없이 와서, 아키코 씨에게 「(감금되어)고생이 많지」 「우리도 이랬어」 하는 등의 말을 건네 왔다.

마츠나가 목사는 감금 후 일주일 정도 지나서 설득하러 왔다.

「나는 축복(결혼)을 지키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론으로 반항해 가면 감금이 길어질 뿐이므로 『우리는 교회에 안 나가고 보통으로 살고 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구치 씨 때도 『그만두었다』고 하여 도망쳤으므로, 이번에는 더 심할 것이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부모에 대해서는 『남편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서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받아들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고 아키코 씨는 말한다.

두 번째의 감금 때와 같이 아키코 씨는 「위장탈회」를 시도했다. 마츠나가 목사와의 면담 시간은 정말 「결사적」의 심경이었다고 한다.

「마츠나가 목사는 내가 말한 내용을 나중에 전부 조사할 것이라고 느꼈으므로, 『이 한마디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 너무 긴장하여 토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또, 마츠나가 목사는 면담의 후에 반드시 아버지에게 상황을 설명하는데 『지금 단계에서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좀』 등의 말을 합니다. 그건 정말 칼날을 들이대는 것 같은 감각으로 매일매일이 그러한 영적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마츠나가 목사의 직접 심사 후에 두 번째 금금 때와 마찬가지로 전 신자에 의한 심사가 있었다.

「『재활훈련』이라 하여 나와 탈회한 사람들만으로 밖으로 식사하러 가,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에서도 화장실에 갈 때에는 한 사람이 내 앞에 서고 뒤에도 다른 한 사람이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재활훈련』은 감금 최종 단계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런 몇 가지 심사를 거친 다음 아키코 씨는 해방되었다. 마츠나가 목사가 아키코 씨는 「탈퇴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만, 해방에는 토시오 씨의 지지도 있었다.

「계속 설득하자, 아버지도 『행복하다면 좋다』고 인정해 주었습니다」고 하는 아키코 씨. 아키코 씨가 해방된 날은 새해가 다가오는 95년 12월 29일, 진눈깨비가 내리는 추운 날이었다. 약 2개월만에 남편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납치-감금에 소비된 돈

아키코 씨는 감금으로부터 해방된 후, 부모와 함께 반대부모회 회장에게 인사하러 갔다. 니가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다도를 하고 있는 O씨였다.

이 인물이 아키코 씨가 감금된 맨션의 소유자였지만, 토시오 씨는 「어?」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한겨울이니까 냉방은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은 냉방비까지 청구해 왔습니다. 『어, 이건 뭐예요? 이상해요』 하니까, 『아―, 그거』 하고는 청구서에서 지웠습니다. 제가 지적했기 때문에 다행이었지만, 이 전에 있던 사람도 청구하여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은 마츠나가와 결탁되어 있구나」고 직감했습니다」

토시오 씨는 「월세는 아내가 전부 지불했기 때무에 정확한 금액은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아내는 『엄청나게 줬다』고 했습니다. 보통 집세 레벨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맨션 대금에서) 마츠나가 목사 몫도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을 품었다.

토시오 씨는 니가타의 두 번째 감금이 끝난 이후 마츠나가 목사 교회에 발걸음을 옮기는 일은 없었다.

「관계자가 한패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도 기부금 등을 요구하는 우편물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습니다만, 전혀 보지도 않고 버리고 있습니다」. 요전에도 반대부모회로부터 편지가 와서 「월 3000엔」의 이체용지 등을 보내왔습니다.

토시오 씨는 현재, 마츠나가 목사 등에게 「속았다」 하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다. 또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한 재산 없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다고 한다.

「만약 마츠나가 목사를 만난다면 그냥두지 않겠다. 『뺨을 갈겨 주고 싶다』. 지금은 정말 그런 기분입니다. 280명 이상의 사람이 차례를 기다리면서 먼 곳에서 자동차로 2년간이나 다녔습니다」

반대 목사의 말을 솔직히 믿고 「딸을 범죄자로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일심으로 두 번의 납치-감금을 단행한 토시오 씨. 작년에 죽은 아내 요시코 씨가 가끔 꿈에 나타나 그의 안내로 서서히 통일교회에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교회에 대한 토시오 씨의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반대 목사로부터 철저히 교육되어 온 「통일교회=범죄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없어졌다.

「실제로 교회에 가 보니 나쁜 곳은 아니라고 하는 실감이 있었습니다. 동거하고 있는 딸 부부가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가 볼까」라고 하는 느낌으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라고 하는 토시오 씨.

반대파에 농락 당해 딸의 탈회 설득을 시도한 아키코 씨의 부모였지만, 통일교회에 다니면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결과 부녀가 화해하게 된 것을 아키코 씨는 무엇보다 감사하고 있다.

「아버지가 통일교회에 다니게 되어 부녀가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츠나가 목사도 원리에 받아들여 하나님을 알기를 바랍니다.」


전국납치 감금 강제 개종 피해자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