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감금하의 치열한 공방

「교단 조직 안에 있으면 스스로 냉정하게 생각하여 벗어나올 수 없다. 그러니까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게끔 통일교회를 검증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주고 있다」, 「마인드 컨트롤 되어 있는 당신을 컬트 교단으로부터 긴급 피난시켜 보호하고 있다」

도내의 교회에서 납치·감금 의 체험을 말하는 고토 토오루 씨=8월 11일
이런 납치·감금 실행자들의 주장에 대해, 고토 씨는 「가족이나 전 신자가 말하는 것은 판에 박은 것같이 패턴화 되어 있어, 그들이야말로 누군가에게 마인드 컨트롤 되어 있다고 느꼈다」라고 당시를 돌이켜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화라면 많이 하자. 그러나 납치·감금은 범죄고 중대한 인권침해다. 여기는 대화나 검증하는 장소는 아니다. 여러분이 『보호』라는 이름아래 강제적으로 신앙을 빼앗으려 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여기는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다」

그러나 매일 같은 문답을 반복하는 데는 과연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든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컨택트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어떤 때에는 옆방으로 통하는 벽을 두드리며 「누구 없어요!」하며 외쳤지만, 응답이 없었다.

또 가끔 욕실 위에 있는 환기구로 어느 층에서인지 모르지만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그래서 욕조에 올라가 환기구를 향해 「감금되어 있으니 경찰을 불러줘요」 라고 큰 소리를 질러댔지만, 미야무라 사장에게 끄잡아 내려졌다. 그때 옥신각신하다가 손에 상처를 입어 피가 흘렀다.

큰 소리를 지르며 현관 도어로 돌진하기도 했다. 가족은 큰 덩치의 고토 씨의 몸에 이불을 씌우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형은 몸을, 여동생은 손을 눌렀다. 특히 어머니나 여동생은 어디에 이런 힘이 숨어 있었나 할 정도의 힘이었다.

형은 회사를 쉬고 맨션에서 같이 생활했지만, 큰 소리를 지르는 고토 씨를 어찌할 수 없었다. 설득에는 전망이 없고,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 때가 많아졌다.

고토 씨는 벌써 40세가 가까이 되어 왔다. 니가타의 맨션에 감금된 것이 1995년 9월, 31세 때. 그리고 10년 가까이 끌어와 「나는 세상에서 뒤쳐져 있어 앞으로 어?게 되나」하는 불안과 초조감이 엄습했다.

「소리지르는 것이 안 되면 단식투쟁이다」고 생각하여 40세를 맞이한 2004년 4월, 과감히 21일 단식을 단행했다. 그때 형수에게 「아직 몰라!」하면서 미친 사람처럼 손바닥이 세 번이나 날아와 뺨을 갈겼다. 「정신차려!」라고 소리치며 바가지에 담긴 얼음물을 등줄기에 쏟아 넣었다.

05년 4월 재차 단식투쟁을 실시하여, 세번째가 되는 다음해 4월 단식투쟁은 30일간이나 했다. 그에 대해 가족은 단식 후 식사를 주지 않는 제재를 했다. 형수는 「죽기를 각오하고 하지? 죽을 때까지 해 봐」라고 욕을 했다.

고토 씨는 정말 죽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가족을 위해서도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을 고쳐 먹고, 간절히 식사를 요구했다. 하지만 나온 식사는 그후 약 70일간, 약간의 미음과 하루 1리터의 스포츠 음료뿐이었다고 한다.

겨울 저녁때였다. 가족에게 「이쯤에서 검증할 (반성하고 신앙을 버릴) 생각이 없느냐?」고 재촉당했다. 고토 씨는 「왜 감금되어 검증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검증할 장소가 아니잖느냐?」고 다부지게 대꾸했다.

그러자 가족으로부터 「당장 나가」라고 하며 밖으로 쫓아내며 납치당할 때 신고 있던 구두를 던져 주었다.

08년 2월 10일, 단신 무일푼, 단식 후의 식사 제재로 인해 영양실조상태(해방 후의 진단)였다. 하지만 그것은 12년 만에 자유 의사로 거리를 걷는 순간이었다.

해방된 후 처음으로 지하철을 탔을 때의 일이다. 승객의 대부분이 아래를 보며 손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에 놀랐다. 12년 전에는 휴대폰으로 하는 메일 등은 물론 없었다. 자유를 되찾은 고토 씨는 동시에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상태"에 있는 것같은 자신을 보며 섬짓했다고 한다.

(「종교의 자유」취재반)


전국납치 감금 강제 개종 피해자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