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감금을 두 번이나 묵인한 경찰

미야코시 미치요

편파보도로 인해 부모가 맹반대

1987년6월의 일이었습니다.

「최근 늦게 귀가하는데, 여기에 다니고 있는 게 아니니? 」

아사히신문에 게재된 통일교회 비판기사를 본 어머니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한달 전, 통일교회에 입회원서를 낸 나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그 순간 말을 잃었습니다. 「화내지 않을테니까 말해 보렴」이라고 하기에, 내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니까, 어머니는 갑자기 변해서 「아버지가 알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하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 신앙을 갖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 후 1년반 정도 묵인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양친은 신앙심이 없고, 「종교는 약한 사람이 하는 것, 신이 있을 리가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1988년11월 초순, 직장을 소개해 주신 선생님과 상의하고, 결정되어 있었던 직장을 거절하기로 하고, 다음해 1월 1일, 통일교회 활동에만 전념하겠다는 취지를 양친에게 전했습니다. 이후 두달 동안, 양친의 맹반대를 받았습니다. 3 월초, 양친을 모시고 도요나카 교회(오사카부)에 가서 교회장님께 직접 통일교회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교회에 맡겨 봅시다」라고 했기 때문에, 89년 4월 1일, 나는 통일교회 활동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양친을 애프터 케어 하기 위해 도요나카 교회 친교회의 분이 저의 자택을 수차례 방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양친은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신앙을 이해해 주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후, 나는 도쿄에 배속되었습니다만, 양친은 91년 1월 경부터 한달에 한 번 전화해 왔습니다. 어느 날 「사업이 어려우니 돌아와 달라. 돈이 어렵다」라고 했기 때문에, 걱정한 나는 3만엔을 집으로 보낸 적도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것은 나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한 구실이었고, 돈은 책상 서랍에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92년 1월, 할머니가 입원하여, 그 간병 때문에 한달 정도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해 6월에는 3만쌍의 국제합동결혼식에 참가한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 후, 야마자키 히로코 씨의 입교보도로 시작된 통일교회 및 국제합동결혼식에 관한 매스컴 보도가 과열해졌습니다. 원래 종교에 비판적이었던 양친은 반대 목사, 전 신자, 좌익 저널리스트들이 하는 편향보도에 영향을 받아 통일교회를 아주 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8월 13일 새벽, 꿈을 꾸었습니다. 어떤 방의 문을 여니까 책상이 있었고, 거기에 문선명 선생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내가 선생님 바로 앞에 앉자, 문 선생님이 「바다가 얼마나 넓은가?」 하고 물어시어, 나는「지구 전체의 70% 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문 선생님께서 가까이 서 있는 사람에게 속삭이는 장면에서 잠이 깼습니다. 그 날, 교회책임자로부터 「축복의 상대가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상대는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보통이라면 두 손을 들고 기뻐하겠지만, 나는 그 순간에 양친의 얼굴이 뇌리에 떠오르고, 「이거 큰일 나겠구나」고 하고 몸서리 쳤습니다. 나는 본가에 가서 보고하기가 불안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전국에서 납치-감금 사건이 다발하고 있었는데,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전도한 사람도 그 때 납치-감금 피해를 받고 있어서 (나중에 돌아왔습니다만)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정 때문에 양친에게는 전화로 알리고, 8월 25일의 3만쌍국제합동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으로 출발했습니다. 나는 귀국 후, 편지로 축복에 대해 설명하고 양친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파의 비판을 받아들여 「축복은 돈벌이 수단」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던 양친에게 축복의 가치를 이해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빈번히 전화가 와서, 「어머니가 자살했다」고 거짓말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나는 책임자와 상담하고, 같은 해 9월 10일,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양친을 전도하려고 했습니다만,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서 아우성치며,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도 않았습니다. 급기야, 통일교회에 전화를 걸어 「딸이 그만두고 싶다고 하니까 탈회서를 보내 달라」고 마음대로 전화하는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해를 구하려고 통일교회의 서적을 소개하고, 한학자 여사가 일본에 오셨을 때에는 그 강연회를 권유했습니다만, 무시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통일원리와 만날 때까지 양친을 존경할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 이런 집에는 있고 싶지 않다, 집을 나갈지 죽을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의 가르침을 받고 양친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통일원리의 가치를 알려서 양친을 축복으로 인도하고 싶다고 기도하면서 대하고 있었습니다만, 무시되어 버린 것입니다.

나는 정말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정 상황을 남편에게 알리려고, 3월 3일부터 5일까지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습니다.

93년 2 월초, 어머니는 다카쓰키시의 시민상담실에 가서 변호사에게서 「오오사카영광교회의 마쯔자와 목사가 좋다」고 반대 목사를 소개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감금 중에 어머니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2월 27일에 축복에 대한 이야기를 듣겠다는 약속을 하고, 도요나카 교회 친교회의 사람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를 방심시키기 위한 함정이었던 것입니다.

[동생이 교통사고], 속아서 감금 장소로

93년 2월 24일, 나는 양친에게 「7시 경에 간다」고 전하고 시장으로 갔습니다. 오후 8시에 귀가하니 가족은 식사 중이었습니다. 내가 식사를 시작하자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둘째 아들이 조우토우 경찰서 가까이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가까운 병원으로 갔다」고 말했습니다. 그 날 아침, 나는 남동생이 대학의 일로 외출한다고 듣고 있었기에, 대학 가까이에서 사고를 당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나가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빨리 가야지, 밥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고 재촉했습니다. 아버지는 「차로 가는 게 빠르다」고 어머니에게 지도를 가지고 오게 하고, 그 지도를 저에게 건네 주더니 장소를 찾아라고 했습니다. 지도를 보니, 조우토우 경찰서 앞에 히가시오오사카 병원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병원에 남동생이 입원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운전하고, 어머니는 조수석에 타고, 뒤 좌석에 큰동생과 내가 탔습니다. 병원에 가는 길은 복잡해서, 어머니가 「거기서 오른쪽, 왼쪽」하고 지시하는 모습에 「잘 알고 있구나」라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고개를 숙이고 흥분된 신경을 억누르려고 했을 때, 아버지가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때 어머니가 진정하지 못했던 것은 납치-감금계획이 잘될지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오사카시 조우토우구의 히가시오오사카 병원의 간판이 보이자 차는 우회전하여, 어디에 세울까 하고 장소를 찾는 체하고 나서, 어느 아파트 앞에 정차했습니다.

제가 차에서 내려 병원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내 앞에 와서 아파트를 향해 밀었습니다. 체격이 좋은 장남도 저의 손을 잡아당겨, 아버지와 함께 저의 등을 밀었고, 어머니도 그 뒤에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는 병원이 아니잖아요? 」라고 하니, 아버지가 「여기다」라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 말에 일순 「병원 뒷문인가?」하고 착각했습니다만, 아파트2층까지 굉장한 힘으로 미는 것을 보고 감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2층에서 3층까지 필사적으로 난간을 잡았습니다. 손을 흔들어서 풀어진 나는 2층과 3층의 문을 두드리고, 집 초인종을 울려서 도움을 구했습니다만, 입이 가로막히고 구두를 신은 채 4층 방으로 억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족에게 이러한 것을 당하여 쇼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방 안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남동생이 있는 것을 보고, 「속았다. 이렇게 당하다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의 지도 아래, 감금 맨션을 준비

나는 93년 2월 24일부터 6월 6일까지 103일간, 오오사카시 조우토우구의 아파트 4층에 감금되었습니다. 거기는 원룸맨션이고 다다미 4조 반 정도의 방에 칸막이 옆에 부엌과 욕실·화장실이 있었습니다. 현관은 보통 열쇠이었습니다만, 도어 체인을 짧게 만들어서 거기에 맹꽁이 자물쇠를 달고 간단히 열지 못하도록 장치되어 있었습니다. 또 하나, 숫자를 맞쳐서 여는 자물쇠도 달려 있었습니다만, 어머니가 노안으로 열기 힘들기 때문에 그 자물쇠는 서서히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베란다 유리 문도 열리지 않도록 섀시 아래 쪽에 자물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화장실 열쇠를 사용하지 않도록 돼 있었고, 아버지가 「일부러 부수어서 틀여박혀 있지 못하도록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칼 등은 특별히 엄중하게 어딘가에 숨겨져 있어, 내가 「면도기를 사 달라」고 부탁해도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베개는 오오사카영광교회에서 빌렸다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방에는 전화도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마쯔자와 목사가 왔을 때,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가져오면 안 됩니까」라고 물으니, 목사는 「없는 게 좋다」고 지시했습니다.

저는 감금되었을 때, 직장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연락도 하지 않고 결근하는 것은 사회상식으로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돌연 사라진 제 대신 누가 일을 맡는 것일지가 걱정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내일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해요?」라고 하니, 아버지는 「오늘 아침, 너의 회사에 전화하여, 잠시동안 병 치료 때문에 쉰다고 연락해 두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제멋대로 하는 가족에 대해 분노가 솟아났습니다.

저는 이전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해 온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도 있어, 이번 감금은 단기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제개종으로 신자 획득을 노린 목사

87년에 제가 통일교회에 입회하고 나서 감금될 때까지의 약 6년간, 어머니는 한번도 내가 소개하는 통일교회 관계의 책을 읽지 않고, 계속 거부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갑자기 「지금까지 배운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 줘. 6년간 어떤 것을 배웠어?」라고 집요하게 요구해 왔습니다. 이것은 목사가 그렇게 하라는 지도에 의한 것이라고 느껴서, 나는 그 유혹에 일체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목사의 지시라고 생각하지 않고, 양친을 전도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다 말하고 있었으면 자기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가 되었으리라고, 나중에 돌이켜 생각했습니다.

그 밤, 현관을 보러 가니, 체인에 열쇠가 있어서 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민감한 어머니는 곧 일어났고, 아버지와 두 남동생도 잠을 깼습니다.

좁은 방에서 끊임없이 감시의 눈이 있기 때문에, 저의 자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해결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저는 「위장 탈회밖에 없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전도한 I씨도 3만쌍 전에 감금되었다가, 교토의 후나다 목사로부터 무사히 탈출해 온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위장탈회가 금방 간파되지는 않을까?」하고 불안해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고민 끝에 결의할 수 있었던 것은 「강행 탈출이냐, 부모를 포기시킬 것이냐, 둘 중의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 감금이 길어질 가능성이 있고, 자신이 정신적으로 견뎌낼 수 있을까, 또 탈출한다 하더라도 과연 결혼한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가, 이러한 많은 불안이 떠올라 마음이 평안치 않았습니다.

감금 후, 며칠이 지나 일본호리네스교단 오오사카영광교회의 마쯔자와 리키오 목사와 전 신자가 왔습니다. 7명 대 1명이 되는 적도 많았는데, 나는 목사에게 「상담이 필요하다면 내가 당신 교회로 가겠다. 통일교회 사람은 이런식으로 통일원리를 배우게 한 적이 없다. 나는 스스로 기뻐하며 배우러 간 것이다. 통일원리를 공부한다고 한다면, 같은 인원의 통일교회 멤버를 부르지 않으면 공평하지 않다」고 항의했습니다.

감금된 환경 속에서 유일하게 희망이 된 것은 마쯔자와 목사가 「통일교회가 낸 책은 무엇이든지 읽게 해도 된다. 그렇게 하면 통일교회의 잘못을 알게 된다」고 말한 한마디이었습니다. 마쯔자와 목사는 그때, 10명 연속 통일교회 신자를 탈회시키는데 성공하였고, 그 전 신자를 자신의 교회신자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탈회시킨 것을 자랑하듯 이야기하는 목사였습니다만, 이런 비겁한 방식으로 신앙을 포기하게 해서, 자신의 교회신자를 늘리려고 하는 기독교에 실망하고, 분노가 복받쳐 왔습니다.

나는 집에 있는 통일교회 출판물 『하나님의 뜻과 세계』 『뜻길』, 그리고 반대목사대책을 위한 서적을 남동생에게 가져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책에 반대 목사의 비판에 대한 대답이 있는지 상대방이 알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리포트 용지에 적었습니다. 자유시간은 모두 공부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공부를 안 한 것을 회개하면서 진지하게 공부했습니다.

그로부터 40일간,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이 어디 변한 것은 자연스럽게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언제 자신이 아파트에 오는 전 신자와 같은 마음이 되어 버릴지 모르는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절대로 내 마음에 사탄을 침범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의 신앙을 되돌아 보면서 교회의 형제자매와의 갈등으로 싸운 내용 등을 회개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

전 신자가 차례로 와서 탈회를 강요했습니다. 그녀들은 감금을 보호라고 하였고, 「탈회 후는 오오사카영광교회에서 재활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저를 완전히 환자취급하는 것이었니다. 전 신자인 T씨는 내가 무엇을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데도, 감금된 상황을 감사하라고 나에게 강요하였고, 「지금까지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을 무엇이든지 이야기해도 좋다. 여기는 그러한 곳이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나와 교회책임자와의 신뢰 관계를 파괴하려는 듯, 과거에 그녀가 책임자에게 심하게 질책받아서 원망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통일교회 사람들은 불손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했습니다.

또, 마쯔자와 목사는 84년 세계일보의 전 간부인 소에지마 씨가 폭한에게 습격 당해 부상한 사건에 대해 범인이 특정되어 있지 않는데도, 「통일교회 신자가 했다」고 단정하고, T씨는 「원화도라는 단체는 통일교회의 테러 조직이다」라고 하면서 통일교회는 무서운 집단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의 불안을 부채질하고, 통일교회를 악의 조직으로 만들어, 자기들이 감금해서 탈회시키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반론하면 마쯔자와 목사는 소리쳤고, 통일교회의 욕만 했습니다. 내가 도망치지 않도록 감시역을 철저히 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나는 마치 부모가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같이 느껴져, 정말 슬펐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나가면 고소할 거야!」라고 하니, 마쯔자와 목사는 「고소하려면 고소해 봐, 나는 대법원까지 간 남자다. 그 대신 너도 당당하게 나와라. 나는 무섭지 않다」고 위협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밤 술을 마시고, 「통일교회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절대로 여기서 안 내보낸다. 6개월 지나도 그만두지 않는다면 정신병원으로 보내겠다. 아버지는 야쿠자와 교제가 있다. 통일교회 녀석들이 너를 데리러 오면, 야쿠자를 불러서 쫓아낼 것이다. 책임을 질 일이 있을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라. 네가 먼저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귀신이 들린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마쯔자와 목사가 돌아간 후,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집에서 반대할 때보다 심하게 맞았습니다. 나는 정말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느껴, 칼을 찾아내어 밤새 품고 잤습니다. 「여기서 내가 빈사상태가 되었을 때야 여기서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심각해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칼(주:칼이라고 해도 플라스틱성으로 잘 잘라지지 않는 칼)이 없는 것을 알게 되어 동생과 어머니가 칼을 빼앗아 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동생이 다쳤습니다. 나는 동생을 상처 입힌 것을 마음 아파하며, 마지막 수단으로 캔참치의 뚜껑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몸을 지키는데 이 방법밖에 없을 때는 이것으로 손목을 벨 생각이었습니다.

폐쇄된 환경에서 모든 사람에게 비판받으며, 믿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으려고 하니 정말로 괴롭웠으며, 이 환경에서 빠져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꿈을 꾸었습니다. 수련회의 반장이 나와서, 「『본성으로 산다』의 몇페이지 몇째줄에 적혀 있다! 」고 꾸중을 들었습니다. 다음날, 전 신자에 부탁해서 『본성으로 산다』는 책을 입수하여, 꿈으로 알려준 부분을 읽으니 비판되어 온 내용의 대답이 실려 있었습니다. 또, 문 선생님이 제자를 데리고 걸어가시는 모습도 꿈에서 보아 격려받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좀비와 같은 악령이 나에게 습격해 와서, 그것을 칼로 세게 찔렀더니, 곧이어 두번째의 악령이 나타나서 습격해 오므로, 그것을 칼로 죽기살기로 찌르는 무서운 꿈도 꿨습니다.

감금을 묵인하는 경찰에 실망

감금되어 20일이 경과했을 때, 어느 판매원이 초인종을 밀었습니다. 나는 현관까지 달려 가서 「도와줘요!」라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경찰을 불러 주었습니다만, 나는 남동생에게 단단히 붙잡혀서, 방 안에서 소리칠 뿐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밖에서 경찰관에게 「부모와 자식 문제입니다」라고 설명하자, 경찰관은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일부러 경찰서 가까이에 정했다. 그렇게 하면 95%의 사람이 탈회한다고 한다」고 하여, 그 이야기로 목사들의 지도를 받고 있음을 잘 알았습니다. 일부러 경찰서 가까이에 감금 장소를 마련한 것은 경찰도 구출해 주지 않으니 신자가 절망하는 등, 심리적 효과를 노려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감금 30일 경부터 마쯔자와 목사의 안색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전 신자만 온 날, 나는 「성서비평학」에서 지적하는 성서의 모순 점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전 신자들은 복음파의 마쯔자와 목사에게 「성서는 한 자도 틀림이 없다」고 배우고 있었던 것이 뒤집어져서 당황해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돌아갔습니다. 그 후, 마쯔자와 목사가 와서 말도 되지 않는 해답을 했습니다.

감금 35일 경, 결국 마쯔자와 목사는 담석 수술 때문에 입원했습니다. 목사가 입원해서 나는 「감금에서 해방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기대는 어긋났는데, T씨가 다카자와 마모루 목사(단립·코우베 마코토 교회)를 새로이 감금 장소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부모가 부탁한 목사가 오지 못하게 되면 끝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나는 다른 목사가 온 것에 매우 낙담했습니다.

다카자와 목사는 그 때 90일간 운전면허정지기간이어서, 큰 가방에 통일교회 비판 자료를 가득 넣어 고베에서 전철로 왔습니다. 다카자와 목사는 통일원리를 잘 모르는데도, 「자신은 반대 목사를 21년 해 왔기 때문에 완성급의 반대 목사다」하며 원리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싶어하는 목사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선명의 호적등본, 36가정(축복가정)의 리스트, 통일교회를 탈회한 사람의 글, 옛날의 『원리해설』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작년은 24명, 재작년은 21명, 통일교회를 그만두게 했다」고 했습니다. 다카자와 목사는 「강제로라도 탈회시킨다」는 분위기가 충만되어 있어 교리비판보다도 스캔덜러스한 화제로 비열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 이외에 동시에 5명 담당하고 있다」고 다른 감금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그 멤버가 이야기한 내용, 위장 탈회해서 도망친 신자의 이야기 등을 했습니다.

위장 탈회에 대한 이야기는 「이러한 케이스도 있기 때문에 방심하지 마라」고, 마치 저의 부모를 교육하고 있는 것과 같이 들렸습니다. 또, 히로시마나 도쿄에도 가서 반대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듯, 「어제는 도쿄에 가서 변호사집회에 참가해 왔다」고 했습니다. 내가 「변호사 가운데 야마구치, 히가시사와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까, 목사는 「히가시사와는 모르지만, 야마구치 히로시와 이토라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통일교회에서 표적되 있다. 두 번이나 습격 당했다」고 말하는 피해 망상가였습니다.

다카자와 목사에게 문 선생님에 대한 비방 중상을 매일 평균 3시간 들었습니다만, 목사는 내가 반론하면 큰 소리를 치고, 기도도 하지 않고 돌아갈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나는 감금에서 도망칠 기회가 없는가를 필사적으로 찾았습니다. 감금 43일째 경, 현관의 열쇠를 풀고, 문틈으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편지를 던졌습니다. 무모한 일이었습니다만, 계단을 오가는 사람이 편지를 읽어 줄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발견되어 몹시 맞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편지를 다카자와 목사에게 보여주고, 목사는 「아직 도망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고 소리쳤습니다. 탈회할 때까지 계속될 무기한 감금을 목사는 「상담」이라고 말하고, 남편에게 연락마저 하지 못하게 하면서, 「혼인신고는 나중에 소송하여 무효로 할 수 있다」고 태연스럽게 말했습니다. 저는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편지 사건이 있은 3일 후, 우연히 주소를 확인 기입하기 위해 경찰관이 방문해 왔습니다. 그 때 나와 어머니 둘뿐이었습니다. 나는 경찰관에게 「도와 주십시오, 감금되어 있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경찰관은 「조용해 주십시오. 방 안에서 얘기를 듣겠습니다」하고 방 안으로 들어와서 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부모와 자식의 상담」이라고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목사나 전 신자가 개입해 온 것, 약2개월 가까이 한발짝도 나가지도 못했다는 것을 호소했습니다. 경찰관은 「가족끼리만 상의하는 것이 최선입니다」하여 내가 연락하고 싶은 주소와 전화번호(도요나카 교회 주소와 전화번호)를 묻고, 어머니도 아버지의 연락처를 물어 「상사와 상담하고 다시 오겠습니다」하고 돌아갔습니다. 나는 감금에서 해방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연락은 아버지쪽에만 간 것 같아서, 아버지는 조우토우 경찰서에 불려 일방적으로 사정을 이야기하고, 경찰관은 「종교문제에 참견하지 않습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밀실 속에서 비참한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하에 두 번이나 경찰관이 왔는데 구해 주지 않아 나는 정말로 실망했습니다.

부모의 불안을 부추겨 계속 감금시키는 목사

내가 떠든 탓인지 아파트 주인이 와서 「나가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설득당해 버렸습니다. 누가 와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금에서 해방되지 않음을 보고, 나는 「될대로 되라!」하고 자포자기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커튼에 불을 붙여 소동을 일으키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파트 거주자에게 피해가 가고, 또 「통일교회의 인간은 이런 짓을 한다」고 나쁘게 비판받을 것을 생각하여, 그것도 단념했습니다.

감금 55일쯤 지나, 내가 조금 얌전해졌기 때문인지, 낮에는 어머니와 둘만이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강제로 밀치고 나갈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소에는 떠오르지 않을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상한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다카자와 목사가 통일교회 비판을 하고 돌아간 후 참을 수 없어서 벽을 치며 울면서 문선생님이 메시아라고 큰 소리로 계속 외쳤습니다. 그것 외에는 자신의 마음을 누를 수 없었습니다. 벽을 마구 때려 오른 손이 파랗게 멍들어 글로브처럼 부어 힘을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심 「이렇게 되어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없게 되어 다행이다」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감금 80일쯤, 통일교회를 구만두겠다고 하지 않는 제게 아버지는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쇼핑하러 외출한 사이, 아버지에게 맞았습니다. 나는 드러누운 채 머리카락이 뜯기고, 계속 차이기도 했습니다. 밀실에서 폭력을 휘두른 후에 아버지는 「앞으로 2주일, 앞으로 2주일이면 그만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사과장을 써라」고 하여 썼습니다. 쇼핑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그렇다면 당신(아버지)이 목사에게 연락하세요」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버지가 마쯔자와 목사에게 연락을 했고, 나는 「드디어 해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마쯔자와 목사에게 설득되어 약속을 철회한 것입니다.

다음날 다카자와 목사가 왔을 때, 나는 어머니에게 「마쯔자와에게 뭐라고 전화했어요」하고 물으니까, 어머니는 「목사가 오지 않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을 뿐이야」라고 했습니다. 맨션 밖에는 T씨의 아버지도 와 있는 것 같았는데, 아버지에게 「탈회 설득(감금)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설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앞으로 2주일」이라고 한 아버지의 약속이 나와 상관없는 곳에서 논의되어 완전히 뒤집어진 것에 실망했습니다.

다카자와 목사는 「이 집은 남동생이 대학에 가서 돈이 없기 때문에 우리 교회 사람에게 부탁하면 모두 마음씨 좋은 사람들뿐이기 때문에 (감금을 위한) 지원금을 내 줄 것입니다. 그래서 1년이나 2년, 알 때까지 하는 것이 좋다」고 하며 지금까지 네 번 감금되어서 탈회한 전 신자의 이야기나, 열 번이나 감금되었다가 탈회한 전 신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도망쳐도 몇 번이나 감금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카자와 목사는 「지금 이 아이를 밖으로 내 보내면 바로 한국으로 갑니다. 통일교회는 그렇게 그렇게 되어 있다」고 부모의 불안을 부채질하며, 계속 감금을 속행시키자고 했습니다.

나는 참을 수 없어서「당신은 우리 집에 화해시키러 왔는가, 분열시키러 왔는가? 어느쪽인가?」하자 다카자와 목사는 「어느쪽도 아니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나는 몸도 마음도 다 망가졌습니다.

감금 90일경, 다카자와 목사 부인이 수술하기 위해 입원했습니다. 다카자와 목사는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그 대신 T씨가 오지마 아쯔요시 씨를 데리고 왔습니다. 오지마라고 하는 인물은 통일교회와 관계된 책을 많이 읽으며 이상한 곳을 찾기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지마 씨는 서일본 복음루텔(Lutheran)교회의 아오타니교회 신도입니다만, 자기 교회를 「쿠루테루(미친)교회」 「루시엘(악마)교회」라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통일교회 문제는 기성교회가 문제입니다」고 했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해요」하고 묻자 오지마 씨는 「기독교는 통일교회의 사람이 방문해 오면 이단시하여 셧 아웃 한다. 목사라고 하여 마음이 넓은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와 통일교회, 어느쪽이 매력이 있는지 비교하면 우리 교회에 사람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전도되는 통일교회가 부럽다. 나는 비디오 센터에 간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동기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랐습니다만, 어쨌든 억지 이론을 많이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오지마 씨의 비판을 듣고 「자기들의 교리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자기들의 교리를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하여 전도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말로 되받았습니다. 그리고 「문선생님을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오지마 씨는 「한 번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카자와 목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역시 「한 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왜 신자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태연하게 말하고, 사람을 비판할 수 있습니까? 감금한 통일교회 신자에 대하여 문선생님을 불신시키기 위한 비방과 중상을 많이 들려주고, 탈회하면 자신의 교회 신자로 만들려고 하니 정말 이 사람들은 위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감금 100일 경, 나는 신약성서를 계속 읽어 가는 중이었는데, 예수님의 발걸음이 문선생님의 노정과 겹쳐져 있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다카자와 목사에게 이야기하자, 「당신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놈이 있다」고 하며 「통일교회의 정통성」이라고 하는 책을 꺼내 반 정도까지 읽었다고 하며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습니다.

감금 103일째, 틈을 보고 탈출

감금 102일째의 밤 늦게,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돌아왔습니다. 술 냄새와 마늘 냄새가 좁은 방에 충만하여 밤새도록 잘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은 일요일이어서 나는 이른 아침 5시에 기도를 하려고 환풍기를 돌렸습니다. 5시40분경, 어머니가 「미치요가 불쌍하지 않아요」라고 아버지를 꾸짖고 우유를 사러 갔습니다. 일요일, 어머니는 자택에 돌아가 청소하기로 했고, 우유를 사왔다가 바로 또 나갈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안쪽 로크만 채우고, 언제나 채우는 체인은 하지 않은 채 냉장고를 여닫으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화장실에 들어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는 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화장실에 들어간 것입니다. 「지금이다!」라고 생각하며 아버지를 보니까, 아버지는 자고 있었습니다. 나는 서둘러 현관으로 가서 안쪽 로크를 열어서 맨발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내려 왔습니다. 계단을 내려올 때, 계속 방에만 있어서 걷지 않았기 때문에 다리가 쇠약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황해서 뛰었기 때문에 오른쪽 다르를 접질렀습니다만, 그 아픔을 참으면서 도로로 뛰어 나와 50미터 정도 달려, 골목길에 숨었습니다. 그러자 개가 짖고, 주탁가에는 개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담을 넘어 어떤 아파트 1층 복도로 나왔습니다. 재가 「미안합니다, 전화 좀 빌려 주십시오」라고 하니, 안에 있던 젊은 남자가 나오더니 「좋아요」라고 해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감금되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자 「교회에서 온 사람 외에는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고 하며 밖에서 보이지 않게 커튼도 닫아 주었습니다.

그 집에 계셨던 분은 정말 좋은 분으로 나를 잘 대해 주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친절히 대해 주어 그때까지 괴로웠던 환경이 거짓말처럼 생각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잠시 후 도요나카 교회의 친교회 사람이 마중와 주어 저는 드디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문제]를 방패로 납치-감금을 정당화

감금으로부터 탈출 한 후 나는 폐쇄공포증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또 감금되는 악몽을 몇 번이나 꾸었습니다. 폐쇄된 환경에서 탈회를 강요당하였고, 혼인까지 무효시키는 공포심은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모에 대하여서도 서서히 두려움이 없어져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지금의 남편 덕분이며,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덕입니다.

저의 납치-감금은 직접적으로는 가족이 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만의 지혜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만큼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부모는 마쯔자와 목사는 후나다 목사들이 행하는 납치-감금 상담회에 가서, 목사나 전 신자로부터 조언이나 지도를 받은 뒤에 납치-감금을 행한 것은 명확했습니다. 통일교회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듣고,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확인도 하지 않고, 오로지 걱정하는 가족의 심리를 잘 이용하여 납치-감금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납치-감금에 의한 강제탈회를 「부모와 자식 문제」로 슬쩍 바꾸어 법의 테두리를 잘 빠져 나가면서 공공연하게 계속 실시해 온 것입니다.

인생이 중요한 3개월 반이라는 기간을 감금에 의해 강제적으로 빼앗기고, 일도 빼앗겨 버렸습니다. 통일교회 신앙을 포기시켜 떠날 때까지 몇 번이나 납치-감금이 실행되는 세상에서는 너무나 무서워 안심하고 살 수 없습니다.

저는 자택에서 상담하게 해 달라고 몇 번이나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의견은 목사들에 의해 모두 무시되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한 것은 저뿐만 아니라 지금도 통일교회 신자가 저와 같이 납치-감금 피해를 입고, 신앙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또 현재도 통일교회 신자 가운데는 가족이 반대목사에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감금되는 공포심으로 귀성할 수도, 가족에게 주소를 알릴 수도 없이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납치-감금은 사람의 행복을 앗아가는 무서운 행위입니다. 이런 납치-감금 피해가 한시라도 빨리 일본에서 없어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전국납치 감금 강제 개종 피해자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