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해(PTSD)란 마음에 가한 충격적 상처가 원인이 되어 갖가지 스트레스 장해를 일으키는 질환을 말한다.

납치·감금에 의한 강제개종은 가장 신뢰하는, 「마음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족이 실행범이 되어 저지른 것이므로, 피해자에 대하여 심각한 트라우마를 주는 결과가 되어 있습니다.

납치·감금에 의해 일으키는 PTSD피해의 실태를 르포라이터 요네모토 가즈히로 씨가 『우리의 불쾌한 이웃』(정보 센터 출판국)의 제6장 「흩어진 가족」에서 레포트하고 있습니다.

이 실태를 알아 주시기를 바라서 저자 및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여기에 내용을 소개합니다.


제6장 흩어진 가족

『우리의 불쾌한 이웃』
요네모토 가즈히로 저

가려워 미칠 지경

아사코는 토츠카의 아파트로 옮겨와 산 지 얼마 안 되어 군마 시절에 있던 아토피 습진으로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었다. "안전한 곳"을 구하여 자유를 구가할 여유조차 없이 가려워 견딜 수 없었다.

피부과에 다녔지만, 증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점차 부작용이 강한 스테로이드제를 바르게 되었다. 스테로이드를 바르는 순간은 개선되지만, 잠시 후, 또 퍼진다. 양이 증가함에 따라 내성이 생기고, 효용시간은 점점 짧아져 간다. 피크 때에는 1개월간 20개나 되는 스테로이드 튜브가 처방되었다고 하니 그 정도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다음해인 97년 봄과 여름에 일주일간씩 입원했다.

퇴원할 경우 조금 개선되었지만 곧바로 3센티미터가 넘는 붉은 염증이 가려움과 더불어 몸 여기저기에 생겼다. 미친 것처럼 긁었지만, 가려움은 전혀 가라앉지 않고 미칠 것만 같았다.

악순환을 끊기 위해 98년 7월 과감히 스테로이드를 바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리바운드다. 단번에 얼굴에서 복사뼈, 배에서 등까지 전신에 습진이 퍼졌다.

원조받기는 싫었지만, 어머니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 5일 아파트로 불러 아버지의 차로 탈 스테로이드를 서포트하는 의원까지 통원하기 시작했다. 피부는 뱀 가죽처럼, 사방 5밀리미터 되는 껍질이 일어나 꺼칠꺼칠하게 되었다. 비늘 상태로 가죽이 벗겨져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또 끈적끈적한 "신선한 아토피 습진"이 나오는 상태였다. 거울을 보니 얼굴은 새빨갛게 부어 있었고, 눈은 감긴 것처럼 되어 있었다. 마치 딴 사람 같았다.

습진이 퍼지는 것과 병행하여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다.

악몽의 패턴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출구가 없는 밀실에서 괴물이 쫓아 오는 꿈이다. 필사적으로 도망치지만 마지막은 붙잡혀 버린다.

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체 모를 것이 자고 있는 아사코의 귓전에서 짖굳은 말을 하고 등을 찌르거나 딱 들러 붙어 있다. 불쾌감과 공포심으로 도망치려는데 가위 눌려 움직일 수 없다.

세번째는 가족으로부터 집요하게 정신적으로 비난을 받는 꿈이다. 반론도 할 수 없이 분노와 굴욕감으로 가득 차 있다. 왠지 장면은 언제나 집이었다.

깨어나면 전신이 땀에 흠뻑 젓어 있고, 침대에서 떨어질 것같이 되어 있다. 침대 한가운데로 가려하지만 가위 눌려 움직일 수 없다.

꿈 가운데서의 일은 아사코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리얼하여 꿈에서 깨어나도 가슴은 방망이질 치고 있으며, 하루종일 불쾌하다.

군마에 있을 때 시작한 음주도 계속 되어, 졸린데 머리는 깨어서 잡생각이 멎지 않을 때는 위스키를 마셨다. 한 병을 비우는데 맨 처음에는 1개월 걸렸지만, 점차 양이 증가하여 2주일만에, 일주일만에, 4일만에, 그 간격이 좁아져 2000년에는 이틀에 한 병을 비우게까지 되었다.

수면과 깨어 있는 간격이 전혀 불규칙적이고, 이상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예를 들어 2000년 1월 일주일간 깨어 있는 시간과 수면 시간은 다음과 같았다.

   23일 오전 4시부터 오전 8시까지 수면(4시간)
   23일 오전 8시부터 24일 오전 5시까지 깨어 있음(21시간 )
   24일 오전 5시부터 오후 3시까지 수면(10시간)
   24일 오후 3시부터 25일 오전10시까지 깨어 있음(19시간)
   25일 오전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수면(5시간)
   25일 오후 3시부터 26일 정오까지 깨어 있음(21시간)
   26일 정오부터 오후 6시까지 수면(6시간)
   26일 오후 6시부터 27일 오후10시까지 깨어 있음(28시간)
   27일 오후10시부터 28일 오후 5시까지 수면(19시간)
   28일 오후 5시부터 29일 정오까지 깨어 있음(19시간)
   29일 정오부터 오후 6시까지 수면(6시간)

매일 많은 양의 위스키를 위에 들이 붓다시피 하여 몸은 피곤한데 깨어 있는 상태가 장시간 계속 되는 매일이었다.

아파트에서 우두커니 있자니 돌연, 분노와 슬픔이 엄습해 왔다. 그렇게 되면 울적한 기분이 되거나, 또 아무 예고도 없이 감금된 것이 떠울라 머리는 빨리 회전하여 흥분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한가지 일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사하고 나서 바로 실내 내장을 착수했다. 반년 걸려 벽이라는 벽은 모두 흰색 페인트를 칠하고, 방문도 미닫이도 모두 바꿨다. 그런데도 조금 쉬면 안 좋은 생각이 덮쳐 왔다. 유일한 위로는 주인 없는 고양이 [미]였다.

아사코가 부모와 같이 도츠카 교회에 간 것은 아파트에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목사 쿠로토리 사카에가 만면의 미소를 띠며 아사코를 모두에게 소개했다.

「보호의 기간은 4개월반이었지만, 더 할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이 사람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사코는 몸을 떨며 「천만에요」하며 중얼거렸다.

아사코의 부모님은 다른 가족으로부터 「자녀분이 탈회해 정말 잘 됐군요」라고 축하를 받았다. 몇 개월 전까지는 현역신자의 가족으로 탈회자의 가족으로부터 지도나 어드바이스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이번에는 딸과 동석하게 되어 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기분 좋았다.

아사코도 토츠카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일요일은 예배와 스터디 그룹, 수요일에도 성서연구회라는 명목으로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다. 모임의 전반은 쿠로토리를 중심으로 모두 둥글게 앉아 전체 모임. 후반은 탈회자, 탈회에 성공한 가족, 현역 신자가 있는 가족, 이렇게 세 테이블로 나뉘어 미팅이나 정보교환을 한다. 현역 신자의 부모가 참가하는 것은 업무의 사정 등으로 주로 일요일에 했다.

아내가 통일교회에 들어가 있는 남성의 상담에 아사코는 이렇게 설득했다

「보호하지 않고 집에서 이야기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부인을 믿지 않습니까? 믿는 마음이 있으면 감정적으로 반발하거나 함부로 반대에 대한 의견을 말하지 말고, 부인의 존재를 모두 받아들여, 부인이 믿고 있는 것을 차분히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에 의문점을 말하고, 서로 대화를 해 나가면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나서 2개월이 지나 남성이 기쁨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아사코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말한 대로 하니 순조롭게 탈퇴하게 할 수 있었다. 보호 같은 것은 안 하는 것이 좋았다. 정말 고맙다」

그 후 아내도 교회에 와서 부부가 같이 감사해 했다.

아사코가 교회에 가는 것은 97년 봄에 입원할 때까지 매번, 아토피로 중단한 이후 매번은 아니지만 99년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부모도 그 무렵까지 이전과 같이 쉬지 않고 주 2회 다녔다.

스터디 그룹에 참가하고 있던 탈회자는 20명이 넘었다. 그 중 몇 명의 탈회자는 역시 토츠카 교회 가까이 있는 아파트에서 독신생활하면서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쿠로토리는 아사코를 위해 자유로운 공간을 보증한다고 약속했지만, 아파트를 알선한 것은 아사코 뿐만 아니었다. 모두 부모와 동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왜 탈회했는데, 교회에 다녀야 하는가?

쿠로토리가 아사코와 부모에게 설명한 것에 따르면 주로 이런 이유다.

아사코 등 전 신자는 탈회해도 통일교회의 사고·행동 스타일, 마인드 콘트롤의 영향이 남아 있어 곧바로 일에 복귀하거나 하면 좌절, 정신에 변조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천천히 휴양하며, 재활훈련을 거쳐 사회에 복귀하는 편이 좋다.

또 신앙을 버림으로 인해 상실감이 크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다. 스터디 그룹에서 전 신자끼리 이야기를 하면서 현역 신자를 가진 가족에게 어드바이스를 하면(반 통일교회의 입장이 되면), 뻥 뚫린 마음의 공동은 차츰 메워져 정신은 안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쿠로토리의 설명에 따라 아사코는 스터디 그룹에 참가했지만, "보호 설득˝이라는 방식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지금의 괴로움은 통일교회의 영향이나 마음의 공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플래시백으로 상기 되는 납치·감금이 원인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때를 봐 가면서 감금의 괴로움을 호소하여, 보호 설득은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직 한 사람 동조한 사람은 제1장에 나오는 타카스 미사였다.


미사의 이야기

아사코의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미사가 토츠카 교회로 오기까지의 경위를 쓴다.

미사(당시 27세)는 88년 연말쯤 통일교회 세미나에 나오게 되었는데, 교단에서 금지되어 있던 다른 종교단체나 자기계발 세미나에 가거나 교단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교단에서 볼 때 모범적 신자가 아니었다. 합동결혼식은 흥미없었다.

94년 통일교회 관련단체인 「세계평화여성연합」으로 조직을 바꾸어, 11월부터 피지로 선교 나갔다. 다음해 5월에 일본으로 돌아와 본가에서 며칠 보낸 뒤 파견 회사에 나가 업무 재개를 신청했다.

미사는 피지에서의 체험으로 통일교회에 의문이 있어 <업무에 복귀하면 교단에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 파견회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역까지 마중 온 부모의 차를 타는데, 자택으로 가는 길과는 다른 길을 달렸다. 이유를 묻자 「여동생이 아파트를 새로 빌려서 거기에 간다」고 했다.

아파트에 가까워짐에 따라 두드러기가 나 몸이 가려웠다. 싫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에 들어가니 여동생의 아파트라기 보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자, 부모가 갑자기 말을 했다.

「여기서 통일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집에서는 여러 가지 방해가 있어서……」

방안을 보니 원래 있던 자물쇠 외에 새로운 자물쇠가 붙어 있었다. 화장실 열쇠는 안에서 잠그지 못하도록 떼어져 있었다. 너무나 쇼크를 받아 패닉 상태가 되어 며칠간 이야기는커녕 식사도 할 수 없어 드러누워 버렸다.

미사가 갇힌 곳은 아사코가 감금된 것과 같은 야요이다이 역앞에 있는 아파트, 방도 같았다. 순서로는 95년 5월에 미사, 11월에 아사코가 "입주" 당했다. 미사 앞에는 다른 여성이 감금되어 있었다.

감금으로부터 3개월 후에 쿠로토리가 나타났을 때는 공포로 인해 떨리는 몸이 멈추지 않았고, 경직되어 버렸다. 쿠로토리는 그런 미사의 모습은 걱정도 하지 않고, 미소를 띄우며 젤리를 내밀며, 간사한 목소리로 「같이 먹어요」라고 말을 걸어왔다.

미사가 경직된 상태로 있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험한 얼굴을 하고는 가지고 온 "반대책자"를 책상 위에 거칠게 내려 놓고는 「이것, 읽어」라고 한 뒤, 통일교회 스캔덜러스인 욕을 하고는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1개월 반 후에 쿠로토리는 전 신자와 같이 와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통고했다. 아사코 때와 같이 납득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미사는 저항했지만 부모 등 네 명 앞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강제로 방에서 끄집어 내어져 군마의 맨션으로 이송되었다. 이송에는 선도차가 따랐다.

미사는 쇼크와 동시에 기력을 잃고, 그날부터 16일간에 걸쳐 식사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깡마른 딸의 모습에 걱정스럽게 말하자 시미즈는 미사 본인 앞에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만약의 경우가 되면 병원에 데려 가서 링겔 놓으면 되기 때문에 괜찮아요」

단 한 번, "단식대책" 때문인지 쿠로토리가 온 적이 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들어줄테니 말하라고 하여 「여기서 나가고 싶다.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을 갖고 싶다」고 했지만 「그것만은 안 된다」고 쌀쌀하게 거절 당했다.

미사는 점점 식욕이 없어지고 막다른 길에 들어선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든 목사가 하라는대로 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몇 번이나 「부모와 자식의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식보다는 목사의 말이 전부였다. 더 이상 부모에게 무슨 말을 해도 쓸데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사는 마음을 다잡고 몇 개월간 무시해 온 "반대책자"를 혼자 마구 읽었다. 통일교회에 대해 느껴 온 몇 가지 의문에 대해서 납득할만한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탈회 표명 후, 아사코와 같이 오타 하치만 교회에 나가고, 감금 현장에도 동행하게 되었다. 2주일 정도 그렇게 하자 「새로운 신자가 여기에 들어오니까 집으로 돌아가 달라」고 하여 나가게 되었다.

미사는 본가로 돌아가지 않고 도쿄에서 아파트를 빌려 파견사원으로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금현장에서 본 신자들의 감정을 억누른 가면과 같은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거기서 주말이 되면 군마로 다녔다. 탈회설득이 아니라 어떻게든 감금의 공포심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다.

도쿄에서 군마까지 2개월 정도 다닌 후, 이번에는 어머니가 다니는 토츠카교회의 스터디그룹에 들어가게 되었다. 「납치·감금은 이제 그만두어야 하다」고 쿠로토리를 설득하려 했기 때문이다. 도쿄의 아파트에서 나와 일부러 토츠카 교회 옆으로 이사해 왔다. 그만큼 심각했다.

아사코가 온 것은 그로부터 수개월 후다.


더블 바인드(double bind)

둘은 때를 보면서 "보호 설득"은 그만두어야 하다면 쿠로토리에 이야기했다. 각각 개인적으로 쿠로토리와 이야기한 적도 있다. 만족스러운 반응은 거의 없었지만, 때로는 성질을 내며 「보호 설득이 아니면, 그 외에 어떤 방법이 있어!」 하고 고함졌다. 한편, 아사코가 공개면접에서 여럿에게 납치 되었을 때의 괴로움을 호소했을 때에 쿠로토리는 「노상 보호만은 그만두기로 해요」라고 모두에게 말한 적도 있었다.

아사코는 아토피 습진으로 괴로워하는 것과 수면장해도 쿠로토리에게 상담했는데, 그에 대한 어드바이스는 없었다. 점차 쿠로토리의 태도는 냉정해져 갔다. 전화를 걸어도 「지금 바빠」하며 곧바로 끊어 버리는 횟수가 증가하여, 아사코는 배신당한 기분이 되어 갔다.

쿠로토리의 태도와는 달리 아사코가 쇼크를 받은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떤 남성 탈회자의 이야기다.

「그렇게 괴로워, 괴로워 한다면 통일교회 신자인 채로 있는 편이 좋았단 말인가?」

칼로 마음을 도려내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가 한 「더블 바인트」의 물음은 정신분열을 가져 오는 위험한 커뮤니케이션 패턴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를 불러서 가까이 가면 밀쳐 버린다.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거나 화를 낸다. 아이는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 탈회자의 질문도 같다. 보호설득이 싫으면 통일교회 신자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신자로 있기 싫으면 "보호 설득"을 인정해야 한다. 아사코에게 있어서 어느쪽도 선택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주1〉


한편, 부모가 교회에 가는 것은 아사코가 몸이 좋지 않아 나가지 못할 때도 계속되었다. 미사의 부모도 자주 만났다. 자식이 탈회하면 교회에 나갈 필요가 없는데, 탈회자 가족은 성공자로서 고민 중인 현역신자 가족을 지원해야 했다.

가족 사이에 "사례봉공"이라 불리는 무상 봉사활동이다. 사례봉공은 성공 체험을 이야기할 뿐 아니라 "보호설득"을 돕기도 한다. 아사코의 부모는 3건에 관련되어 있었다.


부모님의 사례봉공

하나는 코바야시 쇼이치로(36)의 납치·감금이었다.

이하는 납치 당사자 코바야시의 간증이다.

「97년 4월의 아침, 아르바이트 가기 위해 도쿄의 센쥬 경찰서 가까이서 길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나 『소이치로다!』 라고 외치는 순간 엄청난 기세로 달려 왔습니다. 아버지 주위에는 어머니와 친척을 비롯해 20명 가까운 남녀가 있었고, 그 중 네 명이 아버지와 함께 습격했다. 손발이 붙잡혀 들어올려져 웨건 차에 실렸다」

이 20명 가까이 있던 사람들 중에 두 명이 아사코의 부모다.

코바야시의 부모님은 토츠카 교회의 스터디 그룹 동료였다.

부모가 코바야시가 소속한 아다치 교회를 매일 지키다가 뒤를 밟아 있는 곳을 알아냈다. 즉시 아사코 때와 마찬가지로 시오노(가명)가 중심이 되어 납치·감금 계획이 구체화 되어 갔다. 코바야시의 얼굴 사진이 모두에게 배부되었다. 당일, 토츠카 교회에서 참가한 것은 아사코의 부모님을 포함해 아홉 명으로, 납치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고, 주위에서 방해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

또 하나는 탈주해 온 전신자를 잡은 케이스다.

96년 12월, 스터디 그룹에서 한창 공부하고 있던 중이었다. 쿠로토리가 안색이 바뀌어 방으로 들어오면서 외쳤다.

「노부코 씨(가명)가 군마의 맨션에서 도망쳤대요! 그것도 맨발로! 방금 시미즈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수색하러 가 주지 않겠습니까?」

카마쿠라에 사는 노부코의 부모도 스터디 그룹 멤버였다. 첫번째 감금에 실패하고, 두번째에 겨우 성공하여, 「선라이즈 오타」에서 시미즈의 설득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아사코의 부모도 탈회자의 아버지, 여성 탈회자 네 명이 달려 나갔다. 간 곳은 확실하지 않지만, 짐작되는 곳은 이전에 노부코가 지내던 세타가야의 교회시설 옆에 있는 홈이다. 바로 차를 몰았다.

차를 시설 옆에 세웠을 때 우연히도 군마 넘버의 택시가 옆에 서더니 노부코가 내린 것이다. 같이 간 여성 탈회자가 「여기, 여기」라고 부르자 도와주러 온 것으로 착각했는지, 그대로 아사코의 부모가 탄 차에 들어왔다.

차는 그대로 군마로 돌아와, 토네가와 부근에서 기다리던 시미즈에게 넘겨졌다.

몇 개월 후 노부코는 부모와 같이 토츠카 교회에 왔다

부모가 모두에게 인사했다.

「어리석은 딸 때문에 그땐 여러분께 폐를 끼쳤습니다」

아사코는 은근히 화가 났다.

〈감금하는 부모가 싫어서 도망갔는데, 책임을 자식의 탓으로 하다니〉

노부코를 데리고 돌아오는데 한 몫을 한 여성 탈회자는 아사코에게 「노부코 씨와 만나기가 무섭다. 도망 간 것을 잡았으니까」라고 했다. 이 여성 탈회자도 탈주한 경험이 있었다. 아사코가 들은 에피소드다.

「산중에서 맨발로 도망치고 있을 때 『저기다!』 『여기 있다』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마치 사냥하는 것 같았다」


셋째는 납치가 실패로 끝난 케이스다.

납치 대상자는 이마리 리에(39)다. 리에는 세 자매 중 장녀로 자매 셋 다 신자였다.

아사코가 납치·감금되기 1개월 전인 95년 10월, 리에와 바로 밑 동생이 거의 동시에 군마의 맨션에 감금되었다(동생은 감금을 부정). 동생은 시미즈의 설득으로 탈회했는데, 리에는 1주일만에 맨션 2층에서 물받이 홈통을 타고 도망쳤다.

아사코가 요코하마 아파트에 감금되었을 때, 여동생이 부모에게 밝은 화제의 메모를 건네 준 적이 있었다. 〈작년에 리에 씨 동생 설득을 끝냈는데, 결과가 좋았다고 합니다. 잘됐군요〉. 이것은 리에의 동생이 탈회한 것을 가리킨 메모였다.

맨션에서 탈주한 리에는 그 후, 합동결혼식에서 맺어진 지금의 이마리 토모야에게로 도망가 혼인신고를 했다.

그 리에를 다시 납치할 계획이 세워졌다. 중심이 된 것은 역시 시오노였다. 불러내는 역할은 탈회한 동생으로 장소는 카와사키시 미야마에구의 레스토랑. 아사코의 부모도 사전에 봐두었다. 그런데 당일 이마리 토모야와 리에는 모습을 나타내긴 했지만 레스토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덧붙여, 아사코의 부모는 관여하지 않았는데, 그후 리에는 동생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같이 패밀리 레스토랑인 데니즈에서 식사를 끝났을 때 부모와 친척, 부모가 아는 사람, 시오노 등 10명 가까운 남녀에게 습격당해 안경이 부셔져 부상한 토모야를 남겨놓고 리에만 데리고 사라졌다.

감금 장소는 요코하마시, 후지사와시로 전전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의 맨션이었다. 설득하러 온 사람은 오타 하치만 교회의 시미즈 목사였다. 6개월간 감금생활을 후 위장탈회로 해방되어 남편인 토모야에게 도망쳤다.

이것들이 아사코 부모의 "사례봉공"의 구체적 내용이다.

부모는 어쩔 수 없이 납치·감금을 도운 것이 아니었다.

군마의 맨션에서 도망간 노부코를 잡기 위해, 바로 차를 몰고 달린 것처럼, 사악한 교단으로부터 아이들을 구출하려면 "보호"할 수 밖에 없다고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호"의 후유증에 괴로워하는 딸 옆에서 솔선하여 "보호"를 돕는 부모--비극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전시하"의 토츠카 교회

이야기를 되돌려, 아사코의 아토피가 차츰 개선되고 있던 99년 초의 이야기다.

아사코가 오랫만에 나간 도츠카 교회의 분위기는 바뀌어 있었다.

전술한 이마리 리에와 토모야에게 쿠로토리 목사가 고소당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리에 씨 부부는 99년 1월, 쿠로토리, 시미즈, 부모, 친척 등 여덟 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요코하마 지방법원에 제기했다고 한다(이하 오쿄하마 재판).〈주2〉

이것을 계기로 아사코, 미사, 아사코의 부모, 토츠카 교회와의 관계는 완전히 바뀐다.


요코하마 재판이 시작되고 나서 쿠로토리의 온화한 얼굴이 일그러지고, 찢어지는 목소리가 되는 날이 많아졌다.

제소되어 패닉 상태가 된 것인지 「나는 리에 씨의 어머니를 모른다! (모두에게 동의를 요구하듯) 나, 모르지?」하고 말하거나, 아사코의 부모에게 마인드 컨트롤을 푸는 훌륭한 선생이라고 하던 시미즈에 대해 악담하기도 했다.

「시미즈 선생과 결탁하여 얼마 안 되어 위장탈회로 도망갔기 때문에 나까지 고소당했다. 시미즈 선생은 통일교회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왜 교단은 전 통일교회 신자를 목사로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시미즈 선생의 마인드 컨트롤도 풀어야 하나? 그건 싫다」

쿠로토리가 리에의 부모를 「모른다」고 하면 데니즈에서 납치·감금을 도운 시오노는 입장이 곤란하게 된다. 쿠로토리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의사로 리에의 납치에 관련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건 아니지요?」하며 시오노가 아사코의 부모에게 푸념을 한 적도 있었다.

아사코와 부모는 스터디 그룹 동료와 같이 몇 번이나 요코하마 지방재판소에 가서 방청했다.

그날 법정이 끝나면 언제나 변호사회관이나 가까운 공원에서 변호사를 중심으로 총괄집회가 열린다. 몇 번째인가의 공원 집회에서 아사코는 용기를 내어 감상을 말했다.

「통일교회에 문제가 많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원고가 재판에 제소한 것은 감금이 너무나도 괴로웠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나도 감금 되었을 때는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원고의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 주면 어떨까요?」

어머니도 아사코와 동조하여 의견을 말했다.

리액션은 격렬했다. 집회 참가자 여러 명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당신들은 어느쪽 편이야? 통일교회를 응원하고 있어!」

그들이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 것은 사정이 있었다. 리에의 제소로부터 1개얼 후인 99년 2월 안도루 미츠코(남편은 미국인)에 의해서 같은 내용으로 시미즈가 제소되었기 때문이다.〈별표 참조〉

리에와 미츠코로부터 연이어 제소를 두 명의 목사와 변호사, 지원자들은 일본기독교단 나아가 반통일교회 진영으로 하여와 통일교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납치·감금 등의 방법으로 원고가 믿는 종교의 신앙을 포기할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고소에 대해, 「납치·감금 같은 건 없었다」고 하며 전투 체제에 들어갔던 것이다.

집회 후, 아사코는 쿠로토리로부터 「왜 그런 발언을 했느냐? 신세를 졌으니까 재판을 응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은 아닌가」라고 질책했다.

「납치·감금 같은 건 없었다」라고 하는 이상, 가끔 감금 중에는 괴로웠다고 호소하는 아사코들은 거북한 존재가 되어 갔다.

공원에서의 집회를 계기로 아사코의 부모에게도 온 재판 보고서, 매달 재판지원요청이 오지 않게 되었고, 친하게 지내던 스터디 그룹 동료로부터의 전화도 어느덧 끊어졌다.


악화되는 증상

스터디 그룹의 모임은 재판 대책 일색이 되어, 감금의 괴로움을 소호하는 곳이 없어지자 아사코와 미사의 정신상태는 급격히 악회되어 갔다.

미사의 경우, 토츠카 교회의 스터디 그룹에 나가기 사작했을 무렵은 3개월에 한번의 주기로 2,3일간 정도 우울 상태, 무기력 상태가 되는 정도였다. 그것이 감금의 괴로움을 호소해도 쿠로토리로부터 계속 가볍게 취급될 때 우울 상태는 일상적이 되었고, 거기에 두통, 동계, 구토, 수면장해가 더해지게 되었다.

미사의 증상이 폭발한 것은 「니가타 소녀 감금 사건」이 일어났을 때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소녀가 90년 11월에 니가타현 산죠시에서 하교 도중에 행방불명되어 2000년 1월에 감금한 남성의 방에서 발견되는 무서운 사건이었다. 요코하마 재판이 시작된 지 1년 후다.

신문은 물론 텔레비전, 잡지에 「감금」이라는 두 문자가 매일같이 난무하여, 보지 않으려 해도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플래시백이 몇 번이나 일어났다.

아사코와 미사는 2000년 후반부터 홈페이지에 자신들의 체험과 심경을 털어놓게 되었는데, 미사는 이 때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주3〉

〈연일의 감금사건에 대한 보도, 전철을 타면 매달려 있는 광고에 "감금"아라는 문자가 실려 있다. "감금"이라는 문자를 볼 때마다 감금되었을 때의 일이 플래시백이 되어 생각난다. (소녀의) 부모나 가족, 가정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패닉 상태에 빠졌다〉

〈니가타의 감금 사건은 「언젠가 부모가 와서 도와 준다」. 그런 희망이 (감금 중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직) 좋았다, 부러워서 눈물이 났다. 내가 감금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감금한 것이 부모요, 형제도 친척도 그것을 용인했다. 당연히 경찰도 도와주지 않는다.

평생 여기서 나올 수 없다고 하는 절망감뿐이었다〉


아무리 소년·소녀 시대, 사춘기에 부모와 자식 관계가 나빠도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는 모선과 같은 존재다. 아무리 멀리 항해했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맞설 수 없는 곤란에 빠져도 필사적으로 모선으로 돌아오려고 하고, 설령 표류한다 하더라도 멀지않아 구조해 주러 올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갖는다.

니가타 소녀 감금 사건과의 비교하여 시시비비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 모선이어야 할 부모가 감금하니 다른 사람에 의한 감금과는 다른 의미에서 쇼크가 컸다.

이런 기분은 당사자 외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사코의 정신 상태는 나날이 악화되어 갔다.

〈몸은 본격적으로 자율신경실조증이 되어 오고, 추워도 땀이 멎지 않고, 부은 피부는 찢어지고, 얼얼하게 아프고, 냉방에서 차가워진 몸은 여기저기 근육 근육통이 일어났다〉

〈우울증으로 움직일 수 없다.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 흥미를 가질 수 없다. 사는 것이 즐겁다고 느끼지 않는다. 확 죽어 버리고 싶다. 초조함과 분노로 아무것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일기에서 발췌)

쿠로토리로부터 방치되고, 토츠카 교회도 상대하지 않는 아사코는 수렁 속에서 방황하는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쿠로토리로부터는 「이제 혼자서 자유롭게 살아도 돼」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아파트에서 밖으로 나가도 갈 곳이 없고, 해야 할 일이 찾지 못했다.


통일교회 「홈」에는 토츠카 아파트로 이사하고 나서 짐을 가지러 인사하러 갔다. 또 탈회 직후에 쿠로토리로부터 변호사인 야마구치 히로시를 소개 받아 헌금반환청구와 합동결혼식에서 결혼상대로 정해진 한국인 남성과의 "약혼" 파기에 대한 수속을 상담했다. 야마구치 히로시는 통일교회와 싸우는 「전국영감상법변호사연락협의회」(전국변련)의 사무국장으로 리에가 고소한 재판에서는 시미즈, 쿠로토리의 대리인이었던 변호사다.

약혼 파기에는 언어 문제가 장해가 되어 편지 교환으로 시간이 걸렸지만 상대 남성이 승낙해 주었다.

헌금반환 수속은 헌금액, 물품구입액을 특정하는데, 당시의 통장이나 메모 등을 상세히 검토해야 했다. 아토피의 가려움을 참아가며 만났기 때문에 2년 이상 걸렸지만, 그것도 간신히 해결되어 가고 있다. 야마구치가 교섭해 주어 약 800만엔 청구에 대해 약 400만엔이 매월 분할로 통장으로 입금되게 되었다.

해야 할 것은 모두 끝났다.

서예교실에 다니거나, 장해자 간호 직장을 견학하거나 한 적도 있었는데, 슈퍼의 점원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긴장하는 상태에서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본가로 돌아온 적도 있다. 그러나 긴장한 나머지 토할 것 같았다. 가족과 함께 외출했을 때도 그랬다. 아사코의 기분을 띄우려고 가족은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자 요코하마 아파트에서의 "가족 놀이"가 떠올라 역시 토할 것 같았다.

〈내 감정의 근저에는 언제나 「분노」가 거무칙칙한 중유와 같이 침전 되어 있어, 그냥 두면 계속 화만 내게 된다. 기쁘다든가, 즐겁다는 감정도 곧 분노로 지워져 버려 지속되지 않는다〉(일기)

혼자 고독 가운데 정신과의 격투는 한계에 이르러, 먼저 미사가, 이어서 아사코가 정신과의 진찰을 받았다. 진단명은 두 사람 모두 복잡성 PTSD였다. 이 때, 아사코는 36세였다.


여기서 제1장에서 언급한 PTSD를 설명해 둔다.

PTSD는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의 머리글자를 취한 것으로 일본어로는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해」로 번역되고 있다. PTSD는 대부분 베트남 전쟁 귀한병사에게서 볼 수 있었던 특유의 증상을 기초로 미국 정신과 의사들에 의해 개념화 되어 80년에 『DSMⅢ 정신 질환의 분류와 길잡이』로 받아들여진 이후, 정식으로 정신의학 체계에 등록되었다. 그 후, 강간 피해자나 피학대아동도 같은 증상을 나타내는 것이 밝혀져, PTSD는 많은 정신과 의사나 심리요법상에 지지를 받았다.

일본에서 급속히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미국에서 배운 선진적인 정신과 의사들이 95년에 있었던 한신·아와지 대지진을 계기로 PTSD를 계몽 한 것, 지진 재해에 의료자로서 깊게 관련된 코베대학 정신신경과교수(현 명예교수) 나카이 히사오가 96년에 미국의 정신과 의사 쥬디스 L 하먼의 「심리적 외상과 회복」을 급거 번역해, 많은 정신과 의사나 임상심리사에게 영향을 준 것-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는 교통사고의 피해자에 대해서도 PTSD에 의한 후유증으로 손해배상이 재판에서 인정되게 되어 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사람은 회사에서 상사의 언행이나 연인의 냉정한 말, 근친자의 죽음 등에 의해 자주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많게는 친구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하거나 기분 전환을 위한 여행을 하거나 어떤 형태로든 소화하여, 「과거의 체험」으로 남는다. 그런데 자연치유가 극히 곤란한 충격적인 체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신체의 일부를 칼로 베이는 레벨은 「지난 이야기」로 하기는 곤란한 심적 외상체험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쟁, 폭행, 약탈, 유괴, 인질, 테러, 고문, 감금, 재해, 사고 등」의 직접 체험과 목격이다. 〈주4〉

아사코의 경우는 어땠는가? 나의 질문에 주치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본인의 의지에 반해 납치·감금되었다』라고 하는 신체적 자유의 구속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강제적으로 밤낮을 불문하고 계속 빼앗긴 것 및 『가장 친한 육친에게 감금되었다』라고 하는 신뢰를 배신당한 체험도 더해져, 오랫동안 지속·반복하는 외상 체험에 의한 복잡성PTSD입니다」

자연치유 능력을 넘는 체험을 했을 경우, 상처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딱지 되어 가라앉지 않고 (임상 심리사 니시자와 사토시는 『마음의 이물』이라고 표현한다』,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내게 된다. 몸에 입은 상처는 화농이나 괴사 등의 신체적 증상으로 한정되지만, 심적 외상의 경우는 정신적, 신체적 증상이 되어 나타난다.

PTSD의 주된 정신 증상은 과각성(긴장, 신경의 흥분), 침입적 상기(플래시백), 회피·두드러기로 세 가지다. 신체 증상은 「수면 장해, 두통, 복통, 목마름, 한기, 구토,습진, 경련, 구토, 어지러움, 가슴 부위의 아픔, 고혈압, 동계, 근육 경련, 이갈기, 시력저하, 발한, 가슴 답답함 등」다방면에 이른다.


이것들 하나하나를 보면 아사코나 미사에게 나타난 증상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동의 변화로 알코올, 약물 등에 의존하는 행동, 식욕부진이나 과식 등의 섭식장해를 일으키는 것도 드물지 않다.

제1장에 등장한 유미의 섭식장해도PTSD 증상도 생각할 수 있고, 아사코의 주치의는 아사코의 음주에 대해 「상시 반복하는 감금시의 정경 기억의 침입적 상기를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PTSD와의 관련을 지적하고 있다. 〈주5〉


정신과의나 임상심리사에 큰 영향을 미친 앞에서 언급한 『심리적 외상과 회복』으로 하먼은 「감금 상태」를 「아동학대」와 함께 하나의 장으로 다루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세상에는 안전하다고 하는 감각, 즉 〈기본적 신뢰〉는 인생의 초기에 있어 초기에 케어해 주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약) 공포상황에 있어서 사람들은 스스로 위로하고 비호하는 최초의 원천인 것을 상기한다. 부상한 병사도 강간 당한 여성도 어머니를 부르고,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는다. 이 울부짖음에 응답이 없을 때는 기본적 신뢰감이 산산히 부셔진다」

하먼은 임상 경험으로부터 「부상한 병사도 강간 당한 여성도 어머니를 부르고,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는다」라고 지적하지만, 아사코들은 그 부모로부터 감금되었던 것이다.


전국납치 감금 강제 개종 피해자의 모임